29 발레 하는 쿠크다씨

동전 뒤집기

by 쿠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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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을 옮기면서 일상이 동전을 뒤집 듯 바뀌었다. 아침에 각자의 세상으로 흩어졌던 지난날과 달리, 이제 다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할 때 나는 발레학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삶의 판을 다시 짜야했다.

우리 가족 밤 루틴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격일로 아이를 재우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 뒤, 양치하고 아이 침대에서 셋이 모여 각자 보낸 하루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을 가진다. 내일을 위한 굿나잇 뽀뽀를 하고 당번이 아닌 다른 사람은 자유시간을 갖는다. 자유 시간이래 봐야 30분 남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유시간을 가지는 날에는 일찍 퇴근하는 기분이라 아침부터 설렌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는 오늘 하루 어땠는지 빨리 말하기~ 하면서 대화도 칼같이 끝내고 뽀뽀도 거의 단순 볼 접촉하는 수준으로 끝내고 탈주하듯 아이 방에서 뛰쳐나갈 때도 있다. 일상생활의 마감이 퇴근과 같은 전업주부의 삶에서 조기 퇴근의 쾌감은 어마어마하다.(나만 그럴 수도..) 집안의 공기가 마치 회사에서 반차를 쓰고 퇴근한 뒤 마주한 세상에서 나는 낮 공기 냄새로 바뀌는 기분이다. 딱히 뒤에 계획이 없어도 그 느낌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그게 내 삶의 소소한 낙이었다. 밤에 발레학원을 가게 되면서 그 소소한 낙과 발레랑 맞바꿔야 했다.


저녁 발레학원 첫 수업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식탁에 모여서 '엄마 발레 보내기 작전'을 짰다.

일단 취침 당번 제도를 바꿔야 했다. 요일 지정하여 월, 수, 금은 내가 당번 화, 목, 토는 남편이 담당하고 일요일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일요일엔 그냥 혼자 자는 연습하라고 아이에게 맡겼다. 여덟 살이었던 아이는 이건 합당하지 않다며 반발했지만 언제까지 잠을 부모가 옆에서 잠을 재워줄 수 없진 않냐고 했더니 그럼 문 앞에 엄마나 아빠 한 명 앉아 있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타협했다. 통과.


그다음, 아이는 그럼 화요일 목요일 책은 누가 읽어주냐고 하길래 나는 남편에게 책을 읽어주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책을 읽어주고 학원 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니 책은 읽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제안에 승낙했지만 아이는 아빠는 책을 재미없게 읽는다며 반발을 했다. 아빠의 책 읽는 목소리도 나름 멋지다며 아이에게 어필하고 남편에게 좀 재미있게 읽어보라고 응원했다. 둘은 떨떠름해했지만 딱히 대안이 없으니 알겠다고 했다. 통과.


마지막, 남편은 밤길을 나 혼자 걸어서 집으로 오는 게 걱정된다고 하였다. 학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이 큰 대로변이라 파출소도 있고 괜찮다고 했지만, 걱정을 덜기 위해 학원에서 집으로 출발하면서 남편에게 잘 걸어가고 있다고 문자 한 통 보내기로 했다. 이것도 통과. 이렇게 우리 집 저녁 루틴의 판은 바뀌었다.


학원 가는 첫날 저녁식사시간이 다가오자 새로운 환경에 맞닥뜨릴 생각에 긴장감이 몰려왔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아닌 숨 막히고 초조한 긴장감이었다. 저녁밥을 먹기 전부터 배가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어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식사를 마쳤다. 할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하기 때문에 긴장감을 오롯이 진정시킬 여유 없이 종종거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겨우 시간 맞춰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가서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머리를 올려 묶고 레오타드도 입고 그 위에 옷을 입었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저녁에 혼자 나서는 상황도, 학원 가는 방향도 거의 걸을 일이 없이 차로만 이동했던 길이라 더욱 어색했다. 학원이 가까워질수록 두근대던 심장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도착해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한번 와봤던 것 같이 낯설지 않았다. 와본 것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와봤다. 언제 와봤지... 하면서 기억을 더듬다가 생각났다. 바로 제주에 이사 와서 상담 다니다가 '땅콩 발레학원'에 납치될 때 갔었던 '아몬드 발레학원'이었다. 전화받은 적이 없다던 그 학원이 여기였다니.. 신기했다.


이번엔 원장님이 학원 이름을 알려주시며 추천해 주셨고, 직접 검색해서 전화까지 걸어 면담도 했다. '이 학원인 걸 왜 여태까지 몰랐지..' 하면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입구에서 비친 학원 안에는 수강생들로 가득했다. 한쪽 홀에서는 전 타임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나머지 공간에서 다음 수업 수강생들이 틈틈이 자리 잡고 몸을 풀고 있었다. 공간이 모두 차지된 상태라 문을 열기도 조심스러운 정도였다. "실례합니다."를 연신 외치며 비집고 사무실로 보이는 쪽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막아서며 "상담 전화 하고 오셨어요?" 하면서 물어봤다. 무서운 나머지 한껏 기가 죽어 "네. 오늘부터 수업 듣기로 해서 왔.." 하며 뒷말을 흐렸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 "원장님~" 하고 외쳤고, 수업 중이던 원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사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사무실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빼곡하게 테트리스하듯 매트를 깔고 몸을 풀고 있었다. 수강료를 결제하며 조심스럽게 "저.. oo 학원 원장님이 추천해 주셔서 왔어요.." 했다. 원장님은 반색하며 "거기 원장님도 정말 잘 가르쳐주시는데? 왜 우리 학원으로 왔어요?" 하고 물었다. 마음속으로 '맞아요. 알다마다요.ㅠㅠ' 했지만 "성인 발레 이제 안 하신다고 하셔서요." 하고 짧게 말을 아꼈다. 환복을 하러 탈의실 문을 열자마자 헉했다. 전공생들로 보이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테트리스처럼 매트를 깔고 모여서 몸을 풀고 있었다."안녕하세요..." 하며 문 뒤에 있는 작은 공간에서 쭈구리처럼 수업 들을 준비를 하고 나왔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이 꽉 차있어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사방팔방 발레하는 사람 몸 푸는 사람 천지라 발레 공장 같았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고 한 수강생이 공간에 맞게 매트를 펼쳐주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다 펼쳐지지 않는 매트 위에 앉은 나는 벽을 마주한 채 머쓱하게 발바닥만 주무르고 있었다. 학원 내부의 색감, 사람들의 수, 학원의 공기와 분위기 등 사소한 모든 것들이 이전 학원과 상반되었다.

이전 타임 수업이 끝나고 수업 시작 전 몸을 풀던 사람들이 연습실로 매트를 옮겼다. 흩어져있던 사람들이 모이니 성인 수강생과 전공 학생들 합해 열 명은 넘어 보였다. 나도 구석에 매트를 깔고 자리 잡았다. 잔잔히 흐르는 발레 음악이 흐르는 한 공간에 시끌벅적한 학생들과 각자 말없이 몸을 푸는 사람들. 그 사이에 놓인 내 매트는 오려진 종이조각 같이 동떨어져 있었다. 귀에 들리는 피아노 선율이 마음을 안정시키기보다는 내 숨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사람이 있어서 고개만 푹 숙이고 아까처럼 계속 발바닥만 주물렀다. 내 인생에서 발바닥을 제일 많이 시간이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원장님의 예의주시하는 시선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공생들이 학원을 옮기는 경우는 종종 있긴 하다만, 나는 그저 옮긴 성인 수강생 나부랭이라 큰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흘깃흘깃 보시던 원장님은 점점 가까이 오시더니 아예 대놓고 옆에 서서 날 보고 있었다. 교육자 입장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배웠나 보자." 하는 느낌이었다. 지난번 마지막 수업 때 왜 원장님이 힘든 특강을 했는지 이제야 납득이 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잘 해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내가 허투루 발레를 배우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원기옥을 모으듯 배웠던 모든 것을 끌어올렸다.


끝난 줄 알았지만 점프 수업이 남아있었다. 일렬로 서서 한 사람씩 반대편 끝까지 점프를 했다. 이전 학원에서는 서너 명 남짓의 인원이라 심리적 압박이 없었다. 앞사람들이 한 명씩 뛰어서 반대편으로 갈수록 두려움은 더 커졌고 내 차례가 코앞이 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무서워서 돌아버릴 거 같았다. 다리를 달달 떨며 서있는 나를 본 반대편에 선 수강생들은 박수를 치며 응원해 주셨다. 감사하지만 더욱 숨 막혔다.'손뼉 치지 마세요 나 제발 쳐다보지 마세요ㅠㅠ'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엉엉 울었다.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함께 뛰어주셨고 그분들은 또 박수를 쳐주셨다. 정신이 어질어질한 채 수업이 끝났다.


돌아가는 깜깜한 밤길. 결혼하고 겪은 첫 명절에 한복 입고 동동거렸던 내가 생각났다. 북적북적한 남편의 가족들 사이에 붕 떠있던 그날이 떠올랐다. 식구도 객식구도 아닌 애매했던 내 위치.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있지만 경계를 놓지 않는 모습들. 모두가 날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불안감. 흠 잡히지 않으려고 곤두세웠던 긴장감까지. 사랑하는 남편이라는 단 하나의 매개가 아니었으면 마주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 관계가 참으로 낯설고 힘들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발레'라는 매개로 만들어진 이 새로운 세상을 겪어내고 견뎌내야 한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매 순간 엄마가 보고 싶어 눈시울을 붉혔던 첫 명절처럼, 원장님이 보고 싶어 눈시울을 붉히다 울면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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