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번
일주일에 두 번, 저녁이 되면 학원 갈 시간이 다가온다. 남은 에너지를 밥통에 밥풀 긁어모으듯 모아서 학원 갈 준비를 한다. 발레복으로 갈아입고 운동복으로 대강 은폐 엄폐를 한 뒤 거울 앞에 서서 꼬리빗으로 머리를 묶는다. 하루 중 제일 공을 들이는 일이 머리를 묶는 것이다.'발레 번'이라고 불리는 머리 묶는 법은 전에 다니던 학원 원장님이 가르쳐 주셨다.
처음 원장님이 머리를 묶어주셨을 때가 생각난다. 수업 전에 갑자기 머리 묶어주시겠다며 슬그머니 다가오셨다.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에 잡아 쓱쓱 빗질해서 고무줄로 꽉 묶은 뒤, 얇고 촘촘한 머리 망을 살살 씌운 상태로 긴 머리를 뒤통수에 딱 붙게 돌돌 감았다. 그리고 실핀과 U자 핀을 빙 둘러 꽂아서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했다. 눈꼬리가 위로 딸려 올라갈 때는 마치 일곱 살 때 어린이가 된 것 같아 웃기기도 하고 신기했다. 다른 사람이 내 머리를 묶어준 적도 거의 드문 일이라 어색함에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었다.
발레 처음 배울 때는 걸리적거리지 않으면 되니까 긴 머리 하나로 쓱 묶었다. 수업 초반에는 정갈했다가 점점 흐트러지더니 등에 땀이 흐르니까 등판에 엉겨 붙기 시작했다. 엉겨 붙어 고정이 된다면 참 다행인데 턴을 돌면 땀에 적신 긴 머리가 함께 돌아 찰싹찰싹 얼굴을 때리기도 한다. 뺨이라도 맞지 말자는 마음에 소위 똥 머리라 불리는 머리로 진화했다. 싹 말아 올려서 깔끔하고 시원했지만 단점은 있었다. 매트 운동을 하려고 머리를 땅에 대면 주먹 높이만큼 바닥에서 머리가 땅에 떨어진다. 걸리적거려서 느슨히 풀어 귀 옆쪽으로 치우고 매트 운동을 한다. 바 워크 하기 전 한번 다시 묶은 머리는 스멀스멀 흐트러지고 센터 하기 전에 다시 묶은 머리는 점프할 때 뒤에서 덜렁덜렁 같이 춤을 춘다. 중간에 고무줄이라도 끊어지면 집중하던 맥도 탁 끊긴다. 주섬주섬 머리를 묶다 보면 내가 머리를 묶으러 온 건지 발레를 하러 온 건지 짜증이 나는 날도 있었다.
그때 발견한 아이템이 대왕 집게핀이었다. 집게핀은 사실 어디에서나 만능 아이템이다. 밥 할 때, 청소할 때, 욕실 타일을 박박 문댈 때, 아이랑 놀이터에서 뛰어다닐 때 등등 여러 검증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아이템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커다란 집게핀이 매트 할 때 알아서 변신로봇처럼 납작하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집게에 뒤통수를 탁 찍히며 알아버렸다. 정수리 쪽으로 집게핀을 올리고 누워서 매트 운동을 실컷 하고 거울을 보면 웬 수탉 한 마리가 앉아있다. 고무줄보다는 머리 만지는 빈도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센터 수업쯤 되면 드라마 추노에 나오는 주인공 '대길이'가 되었었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던 와중에 선생님이 묶어준 발레 번은 신세계였다. 깔끔한 데다가 묶은 부분이 뒤통수에 딱 붙어있어서 누워도 지장 없고, 아무리 뛰어도 잔머리만 좀 흐트러질 뿐 너무 편했다. 이래서 무용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이렇게 묶는 거였구나!!! 그 후 머리 망과 U자 핀, 실핀을 사서 '발레 번'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엄청 서툴러서 머리카락이 삐져나오고 엉망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머리를 묶는다.
한번 묶으면 헝클어질 일이 없어 정말 편한 발레 번에는 최강 단점이 딱 하나 있다. 바로 광활한 이마와 거대한 얼굴이 '옜다!! 이게 내 얼굴이다!!' 하는 느낌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오전에 학원을 다녔을 때는 미리 학원에 일찍 가서 묶었는데 지금은 시간도 촉박하고 사람도 많아 머리를 묶을 여유가 없다. 영락없이 머리를 묶고 학원을 가야 하는 상황이다. 저녁이라 깜깜해서 사실 룰루랄라 걸어갔는데 요즘 해가 길어져서 룰루 걸어가다 상점에 비친 모습을 보면 흡사 수모를 쓴 것 같기도 삭발한 사람 같기도 하다. 아직 마땅한 대안을 발견하지 못한 채 흠칫 놀라기만 반복했다.
그렇게 보일지언정 발레 번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하루 일과가 진행될수록 점점 추레해지고 누추해지는 게 눈에 보인다. 피로도가 높아지며 삶에 찌든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네시에서 일곱 시 사이 정말 꼴이 말도 못 하게 엉망진창이 되어있다. 그러다가 머리를 정갈하게 빗질해 발레 번을 하면, 약간의 떡진 머리가 정갈함을 배로 부풀려줘서 오히려 머리가 예쁘게 된다. 그렇게 거울 속에 정돈된 나와 마주하는 딱 그 순간이 참 좋다. 누가 귀에다 대고 '자 이제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발레 하러 가세요!'하고 말해주는 기분이다. 거울을 마주 보고 싱긋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 잠깐의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아 꿋꿋하게 발레 번을 하고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