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발레 하는 쿠크다씨

2. 레오타드를 입은 쿠크다씨

by 쿠크다

*Leotard(레오타드) : 쥘 레오타드가 개발한 티셔츠와 팬티가 결합된 형태의 의류이다.

주로 스판을 이용하여 만들며 탄력성이 뛰어나 활동성이 좋고 발레나 에어로빅, 체조 등을 할 때 팬티스타킹 위에 입는 용도로 사용된다. 일상생활에서 입을 경우 단독으로 입지 않으며 치마나 바지를 덧입는다.




문화센터 발레수업도전은 한 학기도 안되어 막을 내렸다. 한 달에 한번 겨우 갈 수 있었고, 선생님께 불참한다는 메시지만 가득하다 끝이 났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평일 저녁, 남편과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걷고 있었다. 실패한 작전을 꼭 성공시키고 싶은 남편은 평일 저녁에 운동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하루 종일 근무를 하고 와서 쉬어도 모자랄 판에 아이를 돌보게 한다는 게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설령 내가 밖에 나가도 마음 편히 뭘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저녁에 나갈 때마다 그네 타러 나가는데 못할 건 없다며 집 근처면 괜찮다는 남편의 말에 솔깃해졌다. ‘그래 또 못할 건 뭐야. 하면 하는 거지.’ 이상한 용기는 꼭 이런 타이밍에 생긴다.


그 길로 남편과 저녁에 할 수 있는 운동을 찾기 시작했다. 즐비한 마천루 사이를 걸으며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운동들이 있었구나 싶을 때, 사거리 모퉁이 건물 창문에 그려진 발레리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호기롭게 건물 앞까지 가선, 막상 계단을 오르려니 다시 마음이 작아진다. 한껏 움츠러든 나를 보고 킥킥 웃는 남편의 손을 잡고 학원에 들어섰다. KTX를 타고 가면서 봐도 발레리나 같은 원장님이 사무실로 안내했다.


돌도 안된 아기를 무릎에 안고 남편과 수업시간과 수강료 준비물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들었다. 일주일에 세 번 하는 90분 기초반 수업. 부담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발레복을 꼭 입어야 한다는 말 부담감이 바위처럼 쿵 마음에 안겼다.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최악이었다. 생각해 본다 말하고 등록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원장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연습실 한편에 수업준비를 하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상아색 발레복에 꽃무늬 스커트를 두른 수강생이 익숙한 듯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요정 같지만 단단해 보이는 그 모습에 첫눈에 반한 듯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등록할 거냐고 물어보는 남편 목소리에 “어? 어.. 나 할래.. 할게요.”가 저절로 나왔다. 발레를 하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 사람처럼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그 학원생이 나만의 비밀스러운 뮤즈가 되어버렸다. 이미 손에는 학원에서 구입한 발레복, 타이즈, 발레슈즈가 있었다.


이틀 후 첫 수업날, 남편의 저녁식사 준비를 마치고 아이를 맡긴 뒤, 서둘러 발레학원으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달렸던 육아와 살림에서 탈출했다는 기쁨이 훨씬 컸다. 학원에 도착하고 타이즈와 레오타드로 환복하고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목욕탕 빼고 살면서 이렇게 날것의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숭하다 숭해.. 하며 민망해하였지만 모두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금방 익숙해졌다. 지난번에 봤던 나만의 뮤즈도 같은 수업이라 설레고 좋았다. 문화센터와 커리큘럼은 비슷했다. 짧은 매트운동 후 발레 바를 잡고 몇 가지 동작을 하고 바 없이 거울을 마주 보는 센터 수업까지. 시작의 설렘은 수업 시작과 함께 사라졌다. 기초반 선생님이 상냥하게 말씀하셨던 간단한 매트 운동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15분도 채 안 되는 매트시간. 머리부터 시작되는 스트레칭과 함께 복근, 등 근육, 허벅지 단련 운동을 하였다. 뮤즈님의 쑥쑥 움직이는 상, 하체에 비해 내 움직임은.. 갓 태어나 뒤집기 하려는 아기 같았다. 사람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근육을 조질 수 있구나. 아쉽게도 나는 조질 근육이 없구나.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흥건하게 땀이 나기 시작했고 아직 10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바 가져오라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집에 가세요.”로 들렸다.


헥헥대며 바를 연습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정렬하고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가장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선생님은 굽어있던 목, 어깨, 척추를 엿가락 늘이듯 늘여 잡아 주었고, 음악과 함께 짧은 음악에 맞춰 동작들이 시작되었다. 오른발을 중심으로 한 동작을 마치면 같은 음악으로 왼발을 중심으로 한 동작을 해야 했다. 맨 앞에 선 뮤즈님의 아주 자연스러운 순서에 의지해 한 걸음씩 따라가고 있었다. 첫 음악에서 끝으로 갈수록 순서는 복잡해지고 순서를 외우던 머릿속은 과부하가 오기 시작했다. 지난번 문화센터 수업 전 누워서 들었던 마음을 치유해 줬던 음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음악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또 바랬다. 근육들이 내게 왜 갑자기 안 하던 짓 하냐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시계를 찾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시계를 본다고 시간이 빨리 흐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이 원망스러울 수 있구나.


“바 옮기시고 센터 할게요.”

끝났다고 하니 갑자기 힘이 솟아 바를 번쩍 들어 구석으로 치웠다. 또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거울을 마주했다. 타이즈를 입은 초점 나간 망나니가 서있었다. 기겁을 하고 뮤즈님은 어디 있나 찾았다. 시선 안에 들어온 그 수강생도 땀이 흥건하고 힘들어 보였지만 흔들림 없이 꼿꼿했다. 더불어 강인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부러워하기도 잠시 센터수업은 바를 잡고 했던 동작들을 바 없이 하는 것이었다. 바를 잡고도 못하는데 바 없이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 사시나무 떨 듯 바들거리고 휘청대다 정신을 차리니 마치는 인사를 하고 수업이 끝이 났다.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어 냅다 평상복을 덧입었다. 너무 힘들어서 어떠냐고 묻는 선생님에게 버럭 화를 낼 뻔했다. 학원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난간을 의지하며 내려와 걸어가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TV동물농장에 송아지의 탄생에 나오는 갓 태어난 소 같았다.


겨우 걸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시계가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가 남편의 배 위에 엎어져 잠들어있었다. 이렇게 흥건하게 땀을 흘린 적이 있었나 잠시 생각에 잠겼었지만, 엄마 없이 잠든 아이가 깰까 봐 후다닥 샤워를 마쳤다. 남은 집안일을 조심조심 마무리하고 아이 옆에 누웠다. 눈을 감고 오늘 배웠던 동작들은 하나하나 떠올렸다. 거의 생각나지 않지만 다음엔 잘 따라가 봐야지 하며 드문 드문 기억을 더듬어가다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허벅지와 엉덩이가 조각조각 난 고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기저귀를 갈려고 앉았다 일어날 때, 아이를 재우려 아기띠를 매고 움직일 때 순간순간마다 끙끙거리고 앓는 소리는 내었다. 온몸이 너무 아파도 이상하게 기분이 상쾌했다. 아이가 울면 같이 울던 내 마음도 훨씬 단단해졌다. 첫 수업 때 시계만 찾고 집에 가고 싶더니, 남편이 빨리 퇴근하여 발레 하러 갈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감도 생겼다. 가장 힘들다 느꼈던 순간, 발레는 나를 위로하고 쾌감 선물했다. 그렇게 내 품으로 발레가 들어와 버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1. 발레 하는 쿠크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