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립
학원 등록 후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발레를 갈 수 있었다. 남편의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자주 수업을 못 듣는 바람에 발레 순서를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월요일에 갔다가 그다음 주 금요일에 가게 되는 날이면 다시 처음 시작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날 얼떨결에 거울 맨 앞에 서게 되면 순서를 계속 틀리고 뒷자리에 자리 잡은 사람들도 줄지어 틀렸다. 몇 번씩 오답 도미노를 하고 나니 순서를 열심히 외워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엄마가 된 후로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한 가정과 아이를 맡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도 무거웠고, 아이를 낳고 육아에 익숙해질 만하여 요령이 생기게 되면 그만큼 아이가 자라 새로운 난관에 부딪히고 좌절했다. 계속되는 좌절은 나도 모르게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었다. 해야 될 일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할 줄 아는 일들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이유식 만들며 냄비를 저을 때, 아이를 재우려고 같이 누워있을 때, 아기띠를 메고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이 찾아올 때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 순간들은 발레 순서를 외우는 숙제 시간이 되었다. 수업시간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용어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 아직 입에 붙지 않았지만, 눈을 감고 음악을 떠올리며 바 순서에 맞게 발을 살짝살짝 움직이고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그녀가 서있는 공간이 어느새 발레 연습실로 변한 듯했다. 발레 동작을 하나씩 외워갈수록 나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몸이 말해주고 응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차곡차곡 머릿속에 순서를 쌓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수업시간에 맨 앞에 서도 두렵지 않았다. 전주만 흘러도 그다음 순서가 떠올랐고 점점 더 자신감이 붙었다.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고 박자를 느끼고 즐기기 시작했다. 발레 바를 하는 시간이 너무너무 좋았다. 연습했던 순서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순간이 즐거웠다. 순서를 하나도 틀리지 않은 날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너무 신난 나머지 스텝을 뛰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날도 있었다.
자신감이 차올라 가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나의 서있는 옆모습을 보며 골반이 빠져있다고 말했다. 골반은 멀쩡히 배 밑에 잘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선생님이 나의 빠져있는 골반을 바로 잡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잡아놓은 골반의 중립을 잃으면 안 돼요.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발 끝부터 시작해서 다 무너져요. 순서를 틀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심을 잡는 게 더 중요해요. 어깨부터 골반까지. 내 몸이 박스라고 생각해 봐요. 그 박스가 구겨지거나 흔들리지 않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쉬울 거예요. 거울을 보고 다시 해보면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반대편 축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거울 속 자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몸의 중심을 잡고 같은 동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 힘을 주다 보니 생각한 대로 발이 뻗어지지 않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하면 몸에 힘이 빠져 중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 순서로 넘어갈수록 다리가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답답한 채 수업을 엉망으로 마무리했다. 그동안 바를 잡은 손에 온몸을 의지하고 다리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바에 내 몸을 싣고 신명 나게 발만 휘두르고 있었기에, 바가 사라진 센터 수업 때 온몸이 중심을 못 잡고 엉망이 되는 것이었다. 수업 끝나고 몸의 중립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근차근 생각했다. 우선 골반이 바른 모양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상체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상체를 고정하고 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려면, 상체에 힘이 있어야겠지. 뼈로 힘을 줄 수 없으니 근육이 필요하다… 지금 제일 필요한 건 일단 코어근육이었다.
고백하건대 수업 전에 하는 짧은 매트 운동이 정말 싫었다. 가진 근육이 없어서 더욱 버티지 못하고 엄살을 부릴 때도 많았다. 이렇게까지 수업 초반에 힘을 빼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발레정신의 기강을 잡으려는 기초 훈련이 아닐까 추측도 했었다. 하지만 매트에서 하는 복근을 비롯한 다양한 근력운동이 내 몸의 중립을 만들기 위한 초석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매트에서 발레를 하며 쓸 근육을 단련하고 발레 바의 도움으로 몸의 중립을 찾아 움직이는 법을 연습한 뒤, 센터에서 그 중립을 지키며 의연하게 동작을 해내는 것이었다. 이 중요한 걸 놓치고 퀘스트 깨듯 순서를 쫓고 있었구나. 부끄럽기도 하고 매트 운동 때 좀 더 버텨야지 하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다시 돌아온 수업시간. 그녀는 보다 결연함 마음가짐으로 매트를 시작했다. 열개도 못하던 다리 들어 올리기도 바들바들 떨며 개수를 채우고, 한 두 개 하다 나가떨어지던 등근육 운동도 할딱거리며 끝까지 했다. 20초도 못 버티고 주저앉던 플랭크도 이를 악물고 끝까지 했다. 죽어도 못하겠다 싶을 땐 ‘이 몸에서 사람도 나왔는데 무엇이든 못하겠나.’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바 잡을 때도 근육에 힘이 생기니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 힘들었지만 전보다 땀도 더 많이 났다. 그래도 순서를 다 외우고 있어서 훨씬 몸에 집중하기 쉬웠다. 센터 수업도 여전히 휘청거리긴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법을 조금씩 찾아갔다.
선생님이 말한 골반의 중립. 내게 주어진 아내와 엄마라는 자리는 아직 마음속에서 중립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내 존재가 다 무너졌다 생각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좌절도 바들바들 떠는 내 몸처럼 마음속 근육을 키워주고 있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더 의연하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거울을 마주하며 잘못된 자세를 바로잡을 때마다 마음가짐도 바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