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연하고 싶어.
수업을 들으러 가면 전 타임 수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같이 수업들을 수강생들과 환복 하며 마주치게 된다. 함께 땀을 흘리고 박자를 맞추는 사람들이지만 옷을 갈아입는 순간에 누군가와 마주친다는 것은 참 머쓱하다. 나도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인사 헐레벌떡 갈아입는 편이다.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대략 열두 명 정도 되는데, 모두가 다 참석하는 경우는 드물다. 선생님이 수업 전에 스트레칭을 하며 짧은 안부인사를 하신다. 그 안부를 시작으로 각자가 보낸 하루를 털어놓는다. 하루 종일 회사업무에 시달렸지만 구내식당 반찬이 맛있어서 참았던 사람도 있었고, 퇴근 후 자신의 숙제를 챙겨달라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수업을 들으러 올 만큼 발레가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나의 하루를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그들에 비해 엄마라는 삶이 단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같은 반 수강생들의 이야기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다 각자 다른 곳에서 인생을 살다 발레를 하려고 만난 이 시간이 참 신기했다.
나처럼 말이 없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발레를 등록하러 갔을 때 본 수강생 뮤즈님이었다. 항상 남들보다 먼저 와서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을 흘끔흘끔 보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아닌 척 쓱 스쳤던 적도 있었다. 스트레칭을 하는 뮤즈님의 몸은 발레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봐도 눈에 띌 정도로 유연했다. 몇 주가 지난 뒤, 뮤즈님은 선생님의 권유로 레벨 업 하여 모두의 부러움을 사며 중급반으로 옮겨갔다. 그녀가 중급반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각자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도 발레 수업을 듣는 순간의 고민은 비슷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유연해질까?’
‘발레를 해볼까?’ 생각하면 ‘몸이 유연해야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짝꿍처럼 따라온다. 나도 홀린 듯이 발레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같은 생각을 하다 시작할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몸이 유연해서 취미로 발레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 같다. 유연한 사람들은 이미 전공으로 발레 마스터가 되어가고 있지 않을까. 다들 다양한 이유로 취미발레에 입문하여 발레에 빠지게 되고 ‘내가 좀 더 유연하면 저 동작도 가능할 텐데.’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유연성에 집착하게 된다.
발레를 시작할 때 나는 수유 중이었다. 이유식을 먹는 시기이긴 했지만 틈틈이 수유를 했다. 임신-출산을 한 여성에게 출산 후 6개월까지 ‘릴렉신’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다고 한다. 보통 생리할 때 미미한 양의 릴렉신이 나오고 임신을 하면 최대 10배 이상으로 릴렉신 수치가 증가한다. 릴렉신은 관절 사이를 느슨하게 하여 출산할 때 도움을 준다고 한다. 수유 중인 내게도 릴렉신이 남아있었는지, 처음 시작할 땐 생각보다 몸이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단유를 하고 시간이 지나자 수유할 때처럼 유연하지 않다는 걸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의 유연함은 릴렉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릴렉신 빨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몸뚱이야. 이것이 최선인거지?’하며 몸을 달래고 달랜다. 상상 속 모습은 이미 발레리나가 되었는데, 거울 속 모습은 녹이 슬고 고장 난 빨래 건조대처럼 잘 펴지지도 않고 뻗으려 하면 우지끈하고 부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루는 유연성에 집착하게 된 수강생 한 분이 ‘매일 식초를 물에 타서 마시면 유연해진다’는 말을 했다. 그날 이후 하나둘씩 텀블러를 들고 나타났다.(물인지 식초 물인지 모르겠다.) 나도 사과식초를 사서 물에 타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은 유연해지기 전에 위에 구멍부터 날 거라고 말하셨고 며칠 뒤 정말 나는 위염을 앓았다. ‘식초 물 마시기 붐’은 사그라들었다.
결석을 하게 되면 한 달에 한번 원하는 수업시간에 보강을 할 수 있었다. 고급반, 중급반 수강생들이 가끔 보강으로 초급반 수업에 함께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유독 수강생이 적었고, 고급반 수강생이 보강을 하기 위해 함께 수업을 들었다. 고급반 수강생은 수업 시작 전 몇 번 숨을 가다듬고 쫙쫙 엿가락 늘이듯 스트레칭을 하였고, 그분의 모습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수깡 같은 기초반 사람들과 달리 다리도 양 옆으로 자연스럽게 뻗었고, ‘저게 진짜 되는 동작이구나.’를 새삼 실감하게 해 주었다. 기초반의 마음을 대표한 듯 한 분이 그녀에게 다가가 “어떻게 하면 유연해질 수 있어요?”하고 물었고, 다들 딴짓하고 있었지만 나를 포함한 모두가 자연스럽게 귀를 쫑긋했다. 그녀는 집중된 시선을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도 그냥 매일 하는 거예요. 사람 몸이란 게 참 신기하게도 며칠 아파서 쉬거나 하면 아예 굳어버려 처음으로 돌아오더라고요. 그럼 또 하고요. 계속하니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특별한 비법을 기대하며 보고 듣던 내 눈과 귀는 숙연하게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하루에 몇 시간씩 무용을 하는 무용수들도, 취미발레 고급반 수강생도 어느 동작 하나 갑자기 이루어진 게 없었을 것이다. 무용수들은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꾸준히 스트레칭을 하며 살았을 것이고, 취미 발레도 본업을 병행하며 꾸준히 스트레칭을 하고 스스로를 단련했을 것이다. 기대하는 만큼 안 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낙담하며 비법을 찾기보다는 지금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발레 수업 외에는 스트레칭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도 있었고 스트레칭으로 오는 근육의 아픔을 굳이 시간을 만들어서 느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놓고 유연해지고 싶다며 식초물만 마셔댔다니. 꾸준히 하다 보면 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고 다 그런 건데. 욕심쟁이 었네.
수업을 마치고 아기를 키우면서 눈물을 쏟았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육아 꿀팁이라며 많은 특별한 비법(?)들을 알아내고 적용하다가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스스로를 자책하며 마음 앓이를 많이 했다. 부모라는 비장함을 덜어내고 ‘오늘은 잘 안되네. 내일은 잘 될 거야.’ 하고 툭 털었다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유연해지고 싶어서 집착하다가 유연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매일 저녁 틈을 내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거실 유리창에 비친 내게서 끼익 끼익 소리가 날 것 같지만 그냥 받아들인다.
또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