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엉덩이 탐정
열심히 순서를 외우고 발레에 푹 빠져 살다 보니 내게도 중급반 레벨 업 시간이 찾아왔다. 선생님의 중급반 제안에 입꼬리가 저절로 씰룩였다. 같이 올라가는 분들이 있어서 든든하고 몇 배로 신났다.
경제개발 5개년처럼 결혼 후 ‘자기계발 5개년’을 마치고 임신을 준비하려고 야심 차게 계획을 짰다. 인생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걸 왜 겪을 때마다 뒤늦게 깨닫는 걸까. 결혼과 동시에 아기천사가 ‘까꿍’하고 찾아와 주었다. 잠깐 당황스러웠지만 임신, 출산, 육아도 늘 해왔던 시험 준비하듯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이론을 공부하고 다양한 기출변형을 상상하고 연습했다. 뱃속에서 아기도 같이 공부를 했는지 내 예상과 전혀 빗나가는 성향을 보였다. 귀엽고 단단한 우리 아이는 젖병, 유모차, 분유 등 공장에서 나왔다 싶은 것은 모두 거부했다. 가끔은 원시인이 아기를 키우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때가 참 많았다. 신문물 육아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현실은 초자연주의였다. 미세하게 공기만 달라져도 알아채고 불편해하던 아이 덕분에 우리 부부는 무수한 도전과 실패의 쓴맛을 봤다. 거의 실패 기계가 되어가던 나에게 중급반은 아주 오랜만에 한발 내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들뜬 마음으로 학원 시간표를 보니, 중급반은 같은 요일 오전 열한 시 반과 밤 여덟 시 반 수업이 있었다. 오전은 가능성이 없고, 밤 수업은 남편과 협상이 필요했다. 남편은 늦은 귀가시간을 걱정하였고 수업 끝나고 제일 밝은 길로 빠르게 귀가하는 것을 원했다. 나도 늦은 시간 엄마를 찾느라 아이가 칭얼거리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전화를 하면 바로 귀가하기로 약속했다.
중급반 첫날, 학원 등록할 때 본 원장님과의 첫 수업이라 학원으로 가는 길이 더욱 떨렸다. 기초반 선생님이 손을 꼭 잡고 걱정을 하셨기에 긴장감은 배로 되었다. 기초반에서 함께 올라온 분들이 환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감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첫 수업과 동시에 화기애애함은 사라졌다.
원장님은 앞으로 스커트는 걸치지 말라고 했다. 근육 움직임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몸에 힘 풀리는 것도 본인이 알 수 있다는 말씀. 청천벽력 같았다. 마주하기 싫은 몸뚱이를 가리는 유일한 동아줄이 스커트였는데, 걷어버리면 날 것 그 자체 아닌가. 그렇게 하나 둘 스커트를 벗어 연습실 뒤로 치우고 온전한 레오타드 차림으로 거울을 마주했다. 내 적나라한 몸 선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보고 있으니 얼굴도 크고 허리도 굵고 허벅지는 치킨 닭다리 같고... 특히나 오늘따라 더 못생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에휴, 쳐다보지 말자.’ 하고 거울 속 나와 마주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기초반 수업은 발레를 알아가는데 중점을 두는 편이었다면, 중급반은 자세와 기술을 연마하는데 중점을 둔 것 같았다. 원장님은 한 명씩 다리모양을 봐주며 1번 발모양을 다시 잡아주셨다. 내 다리모양은 약간 X자였고, 1번 발 모양을 새로 잡아 바뀐 발모양으로 자세를 잡으니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을 느끼기 쉬워졌다. 1번 포지션이라고 다 같은 포지션이 아니었다는 점이 신기했다. 매트 운동을 할 때도 허벅지 안 쪽과 엉덩이 근육 단련에 집중되는 운동들이 많았다. 안 쓰이던 엉덩이 근육들이 처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1번 자세에서 막연하게 엉덩이에 힘을 준다기보다 퍼져있는 양쪽 엉덩이를 합체한다는 느낌으로 모아야 했다. 그렇게 모으면 엉덩이살에 보조개 같이 쏙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자연스럽게 발끝부터 코어까지 힘이 들어가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원장님은 바 순서 할 때 무작위로 엉덩이랑 배를 찌르겠다 예고했다. 손가락이 폭신하게 들어가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코스. 잡아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길 바라는 훈련이었다. 연대책임이라는 생각에 책임감이 배가 되었다. 최선을 다해 엉덩이와 배에 힘을 빡 주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머리로는 처음 배우는 순서를 외우며 근육의 힘은 놓지 말아야 한다. 눈으로는 언뜻 보이는 발레복만 입은 내 모습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짧은 순간에 할 일이 너무 많아 과부하가 오기 시작하며 몸의 힘이 점점 빠졌다. 그 순간 엉덩이로 벌침 같은 뾰족함이 느껴졌다. 단호한 원장님은 단박에 음악을 처음으로 돌렸다. 다른 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입모양으로 ‘죄송해요.’ 연신 말하며 사죄를 표현했다. 원장님은 다른 누군가의 엉덩이를 찌르셨고 몇 번을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점점 요령이 생겨서 원장님의 시선을 따라가다 멀어진다 싶으면 살짝 힘을 풀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발각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수강생과 원장님의 힘 풀린 엉덩이 찾기 싸움은 계속되었다. 몇 번씩 되감기 하느라 바 순서를 끝까지 나가지 못했다.
원장님도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갈 거라 생각은 못하셨는지 약간 화가 난 눈치였다. 매일 자기 전 매트 운동을 숙제로 내주셨다. 왜 기초반 선생님이 중급반 올라갈 때 손 꼭 붙잡고 잘하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다. 이왕 올라온 거 그만두지 말자고 서로 약속과 위안을 하며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갔다.
3분도 채 안 되는 음악에도 엉덩이조차 힘을 주기가 이렇게 힘든데, 발레리나들은 몇 시간씩 공연 연습을 한다는 사실에 참 경이롭고 존경스러웠다. 그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시간이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원장님이 내주신 숙제를 매일 해야겠다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가니 아이를 잘 재운 남편이 반기며. “엄마 발레 열심히 하라고 오늘은 칭얼거리지도 않고 잘 자더라.” 말했다. 효녀네 우리 딸.... 엄마는 처음으로 집에서 전화 오길 바랐다.
어휴 엉덩이가 운다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