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발레 하는 쿠크다씨

장비병

by 쿠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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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레오타드만 입고 하는 수업이 점점 익숙해졌다. 첫 수업 때 민망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자기 몫의 발레를 해나가느라 적나라한 몸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원장님은 발레를 이해하며 즐길 수 있게 도와주셨다. 동작마다 어떤 근육이 쓰여야 하고, 그 근육이 쓰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까지 상세하게 설명을 했다. 어느 날은 팔 동작에 등 근육의 움직이는 모양을 보여주기 위해 등이 훤히 드러난 상의를 입고 직접 보여주시는 날도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그 근육들을 내 몸에서 찾아 움직이는 게 보물찾기 하는 수준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머리로 이해해도 이미 다 자라 버린 이 몸은 입력값을 완전히 수행해 내지 못하고 삐걱거리기 일쑤였다. 비록 엉망진창이어도 그 순간들마저 다 좋았다. 원장님의 열정적인 가르침처럼 나 또한 발레를 알아가면서 더 좋아지고 푹 빠지기 시작했다.


누구나 취미를 시작하고 온전히 빠지게 되면 제일 흔히 발병하는 병이 있다. 장비병. 발레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장비병이 발병하게 되면 흔히 스커트, 레오타드를 구매하기 시작한다. 옷 욕심이 없어서 그런가 이상한 포인트에서 장비병이 발병했다. ‘발레 바’였다. 집에서도 수업처럼 바를 잡고 연습하고 싶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바’가 없어도 충분히 발레가 가능했다. ‘바’ 대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는 식탁의자, 싱크대 정도로 허리 높이 정도의 지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능하다. 명분을 찾아보자면 식탁의자는 발을 걸치고 스트레칭하기엔 높이와 너비가 애매했고, 싱크대에 발을 올리는 건 비위생적이었다. 완벽한 ‘발레 바’를 소유하고 싶었다. 머리에 박힌 그 욕망은 떠나지 않았고 학원에서도 틈틈이 ‘바’를 쓰다듬으며 시선을 놓지 않았다. 길에서도 철봉이나 쇠막대기만 보면 저절로 눈길이 갔다. 시작된 집착은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고, ‘바’를 집안에 들이기로 결심했다.


수업이 끝난 밤, ‘발레 바’를 검색했다. 약 10년 전인 그 당시에는 홈 발레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터라 1인용 발레바는 거의 주문제작이었고, 연습실에서 쓰는 발레 바는 제법 비싼 가격이었다. 그러던 와중 발레리나 사진에 파이프 발레바가 눈에 들어왔다. 파이프 발레 바를 검색해 보니, 실제로 파이프로 만드는 포스팅도 있었다. 파이프 업체를 검색하니 원하는 사이즈와 모양의 파이프를 주문 배송하는 업체들이 많았다. 대충 원하는 규격으로 가격을 넣어보니 3만 원에서 4만 원 사이였다.


같이 사는 집이니 남편에게 그 계획을 슬쩍 말하며 상의를 시작했다. 남편은 “바?? 그냥 학원에서 열심히 하면 안 될까? 무용지물 될 것 같은데. 이 좁은 집에서 어디다 두고 연습하려고.” 라며 내 포부를 듣는 순간부터 식초 뿌리 듯 초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침실 벽 쪽에 두고 낮엔 거실로 옮겨서 발레를 할 예정이며, 혼자 다 만들 테니 일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집에서 제대로 연습량을 늘리면 더 잘하게 될 것이라 호언장담하며 말이다. 사실 상의는 명목이었고 남편의 어떠한 반대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낮잠시간에 줄자를 가지고 혼자 사용하기 적절한 길이를 찾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니멀한 1인용으로 시작했지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라는 욕심에 학원에서 쓰는 ‘바’와 비슷한 크기로 점점 길어졌다. 그리고 지지할 여분의 파이프 길이를 계산해 상당히 허술한 도면을 완성했다. 그리고 파이프 업체에 주문을 넣었다. 가격은 4만 원대 정도였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원하는 내 개인용 장비를 얻었다는 기쁨과 설렘으로 파이프를 기다렸다.


이틀이 지나고 송장을 붙인 뽁뽁이에 둘둘 말린 거대한 파이프가 도착했다. 신나는 마음으로 열었는데, '내가 이걸 주문했나.' 싶을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들어있었다. 공장에서 갓 나왔는지 손에 시껌댕이 기름이 가득 묻어 나왔다. 가족들에게 해로울 것 같아 신문지로 박박 닦아내고 또 닦았다. 빡빡한 파이프는 생각보다 조립하기 어려웠지만 낑낑거리면서 모양새를 갖추어 나갔다. 완성된 바를 손으로 툭 건드려보았다. 손아귀 힘이 약해서 그런지 이음새가 완벽하게 조여지지 않아서 흔들흔들했다. 왠지 잘못 건드리면 부품 하나가 빠져 대형사고가 일어날 것 같았다. 잠시 고민을 하다 남편을 기다리기로 마음먹고 파이프를 조심스레 침실로 옮겨놓고 문을 닫았다.


퇴근한 남편은 “신경 쓰이게 안 한다면서요ㅠㅠ” 하며 면장갑을 끼고 허술하디 허술한 파이프 바를 조립해 주었다. 바 지지대인 아랫부분은 이음새가 맞지 않아 번쩍 들면 빙글빙글 돌아갔지만, 쓰는데 지장은 없었다. 투박하디 투박하지만 ‘나만의 바’가 생겼다는 기쁨에 신나게 폼을 잡았다. 이제 학원을 가지 않는 날도 혼자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두근두근 설렜다. 장비 하나만으로도 이미 발레단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날, 침실에서 거실로 커다란 바를 끌고 나왔다. 아이도 신기한 물건에 신난 것 같았다. 나만의 연습이 시작되었다. 발레 바 음악을 검색해서 같은 리듬의 음악으로 바 순서를 혼자 따라갔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짚고 서고, 기어 다니는 아이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서 암탉처럼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그리고 그랑 바뜨망을 하려고 발을 뒤로 차올리다 아이가 맞을 뻔했다. ‘바’에 집착하느라 어린아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공간을 분리하기엔 거실도 너무 비좁았다. 바 순서 나아가기는커녕 "위험해!"만 연신 외치다 안 되겠다 싶어 바를 한편에 놓았다. 호기심이 발동한 아이는 계속 ‘바’를 향해 전진했고, 이음새가 허술한 바는 고정이 잘 되지 않아 잡고 일어서다 넘어질 위험도 있었다. 결국 바를 낑낑거리며 침실로 옮겨 놓았다. 종종 눈치를 봐서 거실로 꺼내면 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에 우다다다 다가왔다. 쇠막대에 집착하는 거 보면 내 딸이 맞는 거 같긴 하다. 아이를 재운뒤 침실 한편에서 조용히 연습하는 걸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집에 들인 운동기구는 옷걸이로 전락하기 마련. 마찬가지로 침실에 자리 잡은 ‘발레 바’는 이불 건조대로 사용되었다. 적당한 높이와 너비로 이불을 촥 널어놓기 너무 좋은 살림의 아이템이었다. 나의 장비병은 그렇게 완치가 되었다. 꾀부리지 말고 학원을 열심히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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