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칭 스타일
보통 강의나 수업은 처음 시작할 때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것을 한다. 앞으로 배울 커리큘럼이나 교육방식 등 전반적인 설명을 통해 수강생이 수업을 크게 파악할 수 있다. 발레 클래스도 다 같이 짜잔! 하고 개강하면 오리엔테이션을 할지도 모르겠다. 발레 클래스 오리엔테이션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모두가 입문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데다 소위 고인 물 같은 분이 있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 하다 보면 다 사라지고 고인 물과 몇몇만 남을 때도 있다. 근데 막상 오리엔테이션 했으면 나는 발레를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친구들과 발레를 같이 배우고 싶다고 손잡고 참관하던 분들이 매트 운동하는 거 보다가 옷 가게 손님처럼 '더 둘러보고 올게요.'하고 나가고 볼 수 없었던 것처럼.
배우려는 사람 입장에서 발레를 시작할 때 '이번 달부터 발레를 해봐야겠어!' 이렇게 각을 잡고 시작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저거 사람이 해도 되는 건가''다리가 막 사방팔방으로 찢어져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연예뉴스 이런 데에 발레 하는 연예인 사진 보면서 '다 부러질 것 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어머나 숭하다 숭해.' 하면서 마음을 접는다. 그러다가 또 길에 보이는 학원 간판 왔다 갔다 하면서 보다가 눈에 밟히고 또다시 고민으로 짚신 하나 엮다가 발레에 발을 담그지 않을까.
이곳저곳 학원을 다녀보고 내 방식대로 크게 두 가닥으로 스타일을 나누게 되었다. 물론 클래스마다 교육 철학과 방식이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이렇다는 걸 정리해 보고 싶었다. 내가 탄 배가 어디로 가는지만 알아도 노를 저을지 내려버릴지 내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정표 같은 차원에서 적어본다.
1. 사랑과 영혼.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랑과 영혼에서 주인공 남녀가 도자기 물레를 돌리며 교감을 하는 아주 유명한 씬은.. 요즘 사람들은 모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여자 주인공 할게요. 선생님은 남자 주인공 하실래요?'일까? 아니 우리는 물레 위 찰흙이다.
선생님은 툭 올려진 찰흙을 곧게 선 그릇으로 다듬어 만든다고 보면 된다. 각 수강생들의 자세를 하나하나를 교정하면서 진행되는 수업이다. 자세 교정을 위한 클래스나 개인 레슨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수업방식이기도 한데, 대체적으로 선생님의 성향이 완벽주의자이거나 수강생의 삐걱거림을 참지 못할 경우에도 많이 나타난다. 또 정신력과 체력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수강생의 평소 가동 범위보다 더 큰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 다리나 팔을 들어 버티거나 움직이는 상황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티칭 후 몸을 풀듯 뻐근한 팔과 어깨를 푸는 모습도 종종 관찰되어 흡사 도자기 장인 같다.
수강생의 입장에서는 구체관절 인형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내가 어떤 방식으로 몸을 써서 자세를 교정할 수 있는지 가장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비포 애프터를 바로바로 알 수 있어서 눈에 보이는 내 몸의 움직임을 그대로 배울 수 있다. 선생님이 한 사람씩 자세를 잡아주기 때문에 수업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티칭을 받지 않을 때, 팔다리를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는 어색함이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스스로 무심하게 갈 길 가는 발레리나라고 상상하며 혼자 동작을 연습하거나 발을 푼다. 또 같이 듣는 수강생이 호기심이 많은 스타일이라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수업이 삼천포로 향하기도 한다. 혼자 조용히 대충 하고 싶은 날이 있어도 선생님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농땡이를 칠 수 없다. 미시적 시각의 수강생은 자신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주변을 의식하지 않지만 거시적인 시각을 가진 수강생일 경우 '왜 저 사람만 많이 잡아주고, 나는 안 잡아 주나.' 하며 다른 수강생과 비교하다 낙담하는 상황도 종종 있다.
2. 이삭 줍기.
명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에서 따온 이름이다. 여인들이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이삭을 줍는다. 대체적으로 인원이 많은 수업에서 적용되는 방식이다. 선생님이 동작을 먼저 시범 보이거나 말로 설명을 하면 다 같이 따라 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커리큘럼이 이삭처럼 뿌려지고 그 동작을 어떻게 주워 담느냐는 스스로의 몫인 수업이다. 선생님은 숲을 바라보듯 수강생들의 동작을 쭉 관찰 한 뒤, 중점이나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주신다. 다수의 인원을 한눈에 담아 이끄는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고, 동작도 크게 시범을 보여야 해서 교관님과 같은 포스를 풍긴다. 모두의 움직임 보려고 레이더처럼 시선을 계속 돌리는 게 느껴진다.
입문이나 기초반 수업에선 설명과 시범이 충분해서 여유롭게 이삭을 주울 수 있지만, 레벨이 올라갈수록 수업 시간에 해야 될 것이 많아 수업 속도가 빠를 수 있다. 그럼 우선 내가 맞는지 틀렸는지 모르니 일단 무조건 주워 담아야 한다. 다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보다 더 헐레벌떡 이삭을 줍듯 선생님을 따라 하고 연습한다. 세세하게 교정받을 시간이 적어 잘못된 습관이 생기거나 힘 조절이 안되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더 신경을 쓰고 수업에 임해야 한다. 반면 가끔 혼자 조용히 힘 빼고 하고 싶은 날에는 선생님의 레이더만 잘 피하면 스스로 난이도 조절이 가능하다. 단 연습실에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꼭 알고 농땡이를 피워야 한다.
+ 물음표 유형
이 유형의 수업은 하나 꼭 집어 말 할 것 없이 자꾸 '이게 발레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PT 체조, 기체조, 진짜 사나이 훈련(?) 등등 그런 발레 외의 어떤 것만 하는 유형이다. 또 '이게 발레일까 아닐까 맞춰봐라~' 할 정도로 긴가민가 하게 하는 수업도 종종 있다. 자꾸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선생님을 의심하게 된다면 그냥 조용히 나오는 것도 방법이다.
위에서 말한 수업에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수업이 끝나면 환복과 동시에 다 잊는다는 것. 학원 출입문에 기억을 지우는 필터라도 달려 있는지 신기하게 리셋하듯이 다 까먹는다. 이때는 매일 간단하게 발레 일지를 쓰면 도움이 많이 된다. 용어도 모르고 아는 게 없는데 기록을 어떻게 하나 하겠지만, 그냥 졸라맨처럼 그림으로 그려놔도 되고 '발 앞으로 들기''고개 누구 보듯 꺾기'이렇게 직관적으로 써도 된다. 그렇게 쓰다 보면 나의 잘못된 습관도 알 수 있고 이번 수업이 어떤 포인트로 이루어져 있는지 파악도 된다. 고백하자면 처음 몇 장 야심 차게 쓰다만 노트가 몇 권 된다.
수업 후에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 눈에 띄게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낙담할 필요가 없다. 선생님이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거나, 같은 포인트를 계속 지적받아 속상할 때도 있다. 매번 잊고 늘 제자리여도 괜찮다. 내가 바꿔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시간이 걸리지만 결국엔 고쳐진다. 즐겁자고 하는 건데 너무 감정 싣고 스트레스받지 말자. 사실 나에게 하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