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의 늪
창피하지만 좌우 특히 왼쪽 구분을 잘 못한다. 아무래도 우뇌의 발달이 안된 거 같다. 확실한 오른손잡이라 왼쪽을 그 '반대'라고 뇌에 각인시켜 둔 덕에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다. 그럼 구분을 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살아가면서 상체의 좌우 구분은 많이 해봐서 그렇게 모지리는 아니다. 문제는 하체의 좌우 구분이 매우 더디다는 점이다. 매트 운동이나 스트레칭을 할 때에도 선생님의 '왼쪽 다리를 들고~' 하면 즉각 실행 버튼이 눌리지 않는다. '왼쪽이 어디더라..' 하며 주변을 쓱 보고 음 약간 반박자 늦게 따라 하게 된다. 하도 두리번거려서 늘 처음 온 사람 같다. 가끔 정신 차려보면 나 혼자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럴 땐 아주 자연스럽게 한 쪽을 한 번 더 해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바 순서를 할 땐 오히려 쉽다. 바를 기준으로 바깥쪽 몸뚱이만 쓰면 돼서 뇌의 과부하가 덜하다. 좌우 구분의 대한 부담만 덜어도 확실히 학습목표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내가 봐도 거울에 비친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바 순서가 끝나 바를 옮기는 발걸음과 함께 왼쪽 공포증이 시작된다. 군대 행군처럼 '왼발~ 오른발~' 하며 내 두 다리를 복기한다. 아마 내가 행군을 했으면 왼발 오른발 순서 못 맞춰서 손발 같이 움직이는 군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우들아 미안해ㅠㅠ 하면서 얼차려 받았을 게 훤하다.
센터 수업의 구성은 이동 범위로 설명하면 쉽다. 처음 순서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움직임의 범위가 좁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넓어져서 그랑 줴떼 점프를 뛸 때는 연습실 끝에서 끝까지 나 혼자 공간을 다 써야 한다. 무용수의 움직임에 국한되지 않고 공간 전체의 방향과 구성을 활용하는 능력까지 키우는 훈련이라고 볼 수 있다. 오오 엄청난 걸 배우는 멋진 사람 된 기분이 드는군.
센터 순서는 배웠던 동작을 토대로 매 번 바뀐다. 외울 틈이 없다는 얘기다. 선생님의 시범을 보면 최대한 눈과 머리에 꾸겨 넣는다. 왼쪽도 시범으로 보여주실 때가 많지만 단순한 순서는 '왼쪽도 같아요.' 하고 끝내면 절망적이다. '그 왼쪽 저는 몰라요.'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거울을 정면으로 듬성듬성 서서 자리 이동 없이 하는 동작은 은근 꿀이다. 맨 앞에만 서지 않으면 컨닝이 가능하고 구석에 서있으면 적당히 반박자 느리게 따라 해도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왼쪽 끝에 서면 안 된다. 왜냐하면 왼쪽을 할 때 내가 벽과 마주해서 컨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 가끔 사람 수가 많아서 '두 팀으로 또는 세 팀으로 나눠서 할게요.' 해서 얼떨결에 맨 앞에 서게 될 때도 있다. 나를 컨닝하려던 뒷사람들은 내 좌우 불능 페이스에 휘말려서 엉망이 된다. 고개를 푹 숙이고 연습실 뒤로 기어들어갈 땐 손으로 쥐구멍 파서 들어가고 싶다.
이동 범위가 점점 넓어져 스텝과 턴을 섞은 시간이 돌아오면 나의 노답은 최고 절정에 이른다. 오른쪽 발과 왼쪽 발을 쓸 때 이동방향은 아래와 같다.
선생님 시범 보면서 거의 두뇌 풀가동을 하다못해 뇌를 행주 쥐어짜듯 짜낸다. 앞사람 스텝을 노려보면서 예를 들어 '오왼오 왼발 앞 턴 턴' 하면서 모스부호 같은 나만의 암호를 만든다. 정식 발레 용어를 여태 잘 모르는 이유가 혼자 만든 암호에 세뇌되어 있어서 그렇다.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결의를 다진다. 앞사람들이 먼저 출발하면 외웠던 암호 계속 떠올린다. 그러다가 내 차례에 맞춰 만든 암호를 주절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오른쪽은 무탈하게 넘어간다. 오른쪽을 하면 음악에 맞춰 바로 왼쪽을 하기 때문에 자리를 옮기는데, 그럼 '어? 오왼오였으니까 왼오왼외오왼오왼위요위용' 하고 버퍼링이 걸린다. 그러는 사이에 앞사람들은 왼쪽 동작을 하면서 쭉 앞으로 나아가고 '왼오왼오오왼 어떡하냐..' 하면서 무방비로 리듬에 몸을 맡긴다. 당연하게 발은 다 틀리고 그 와중에 뒤에서 선생님의 "쿠크다씨 왼발! 왼발!" 하는 소리가 뇌에 콱 박힌다. 내 머릿속에서는 '왼발!!! 근데 왼발 어떻게 하라는 거지?' 하면서 왼발로 냅다 쿵쿵 구른다. 거울로 보면 음.. 약간 발레복 입은 마우이족 같다. 죽창 들고 그 스텝 그대로 집에 가고 싶다. 안 되겠다 싶어서 진행 방향에 따라 '앞발 뒷발'이라 이름을 붙여보기도 했다. 왼쪽의 늪에서 탈출하려는 나의 또 다른 시도였다. 인간은 이족보행이라 그런지 나중엔 어디가 앞발이었는지, 혹시 손이 앞발 아닐까 하는 총체적 난국이 벌어졌다.
왼쪽 동작이 또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순간. 어느 발로 턴을 돌아야 하는지 뇌 정지가 온 순간. 내 시선 안에 들어온 먼저 출발해서 끝낸 사람들의 눈이 너무 무서웠다. 그 시선은 모두 나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지만 눈빛에 잠식되는 기분이 든다. 응원에 힘입을 준비가 안된 내 몸은 또 제멋대로 와르르 무너졌다. 공주님이 마차에 내릴 때 차르르 깔리는 레드 카펫처럼 내가 왼쪽을 시작하면 발레 요정들이 "야~얘 왼쪽 한다~" 하면서 수맥 카펫을 까는 것 같다. 일시적 수맥이 흐른다고 밖에 합리화가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님이 수업 중 답답한 나머지 "이 연습실이 다 내 세상인 것처럼 움직여서 공간을 써봅시다!!" 외치신다. 삶에 갇혀사는 기분이 들어 답답한 날에는 그 목소리에 세상을 열 용기도 생긴다. 내가 가진 힘으로 인생에 주어진 공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 또한 센터 수업을 통해 배우고 깨달아간다. 센터는 마치 팔과 다리로 또박또박 하루를 되짚어가는 일기를 써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지금은 왼손으로 쓰는 일기이다. 쓰다 벅차서 오른손까지 더해 쓰는 그런 삐뚤빼뚤한 일기. 지금은 욕심이겠지만 왼손으로도 또박또박 써 내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