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발레 하는 쿠크다씨

에스메랄다를 배워보자(1)

by 쿠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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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의 작품과 관객의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발레도 마찬가지이다. 프로들이 꾸준히 단련하는 이유 또한 최상의 컨디션으로 자기가 표현하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작품의 의미는 잠시 접어두고 갑자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배우는 입장에서 작품을 배우려면 수강료 외에 작품비를 따로 내야 한다. 로열티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같은 이름의 작품이어도 발레단마다, 선생님마다 조금씩 차이를 두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저작권이라고 볼 수 있다. 생각보다 큰 액수가 나가기 때문에 처음 듣는 사람은 금액을 듣고 '헉' 한다. 내가 만약 콩쿠르를 위해 'A라는 작품을 배우고 싶다.' 하면 개인 레슨비+작품비+의상비+헤어 분장비+콩쿨 참가비 등등 부수적인 비용이 어마 무시하게 들어간다. 이것도 우연히 콩쿠르 이야기를 하다 선생님이 세세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알게 되었다.


몇 년 전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다니던 학원 원장님이 자꾸 "쿠크다 씨는 발레 타고났네." 하며 치켜세웠다. '나 진짜 잘하는 사람인가..' 하며 스스로를 발레 천재로 의심했었다. 지금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확률 100 가스라이팅인데 말이다. 그러다 따로 나를 불러서 "정기공연을 위해서 작품을 하나 따로 배우는 게 어떻나. 작품을 하나씩 배워가다가 지도자의 길로 갈 수도 있다." 하면서 귀 얇은 나에게 태풍 수준의 바람을 넣었다. "지도자요??" 하고 눈이 땡그래져서 순간 판단력을 잃을 뻔했다. 솔직히 '누가 누굴 가르치나..' 생각이 들어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쎄한 기운을 자주 느끼고 이상함을 감지하여 빠르게 그만두었다.


다른 학원으로 옮겨 다시 발레를 배웠는데, 거기 수강생 중 한 명이 그 학원을 언급하며 나를 알아봤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수강생에게 작품을 가르쳐 주겠다며 작품비와 레슨비를 엄청 받아놓고 정작 수업은 제대로 안 해줘서 수강생들끼리 모여서 소송 걸 준비했었다고 했다. 심지어 '작품', '지도자'를 입에 올리던 그 원장은 발레 전공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일이 충격이어서 그런지 선생님들의 '발레 잘한다.'라는 소리는 '고기 사달라는 말인가? '하며 무조건 의심하는 병이 생겼다. 다행히 그 이후로 '발레 잘한다.'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다행인데 왜 눈에서 땀이 나지...


짧지 않은 시간 발레를 배워보니 전공생이 아닌 일반인에게 선생님이 먼저 작품비가 들어가는 작품을 제안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개인의 역량으로 작품을 들어가게 되더라도, 위에서 말한 비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그래도 할 것인가.' '눈물 콧물 쏙 빼게 가르쳐도 잘 배울 것인가.' 재차 물어보고 동의가 되면 진행되는 게 통상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성인 발레에도 단순히 체형교정과 운동 목적을 넘어서서 작품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다수를 대상으로 한 작품반 클래스는 수준에 맞게 작품을 쉽게 풀어 난이도를 낮추고 비용 부담을 줄여 배울 수 있다. 이런 수업들이 많아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중화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원을 옮긴 후 작품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정규 수업 끝나고 30분 짤막하게 배우는 시간이지만 처음 배우는 작품이라 정말 설레고 떨렸다.


작품의 이름은 '에스메랄다'

'에스메랄다'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로 알려진 '파리의 노트르담'에 등장하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발레로 승화한 작품이다. 강렬하고 매혹적인 캐릭터이다. 탬버린과 함께하는 동작 또한 역동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집시'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비하하는 투로 자주 쓰여서 '롬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보통 발레학원 연습실 한편에 탬버린이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건 박자를 맞추거나 트위스트를 추기 위한 게 아니라 에스메랄다를 위한 소품이었다. 작품에 무지한 내가 처음 에스메랄다를 접한 건 아주 오래전 본 유튜브 영상이었다. 무심하게 찍은 연습실 영상임에도 엄청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정말 멋져서 몇 번이고 돌려보고 알고리즘에 뜨면 또 반복해서 봤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2023년 세계적인 콩쿠르 로잔에서 '김시현'학생이 에스메랄다를 선보였는데, 이 에스메랄다가 요즘 내 마음속 1위를 탈환했다. 보고 있으면 저절로 박수가 나온다. 기가 막힌다. 꼭 한번 봐주시길.

https://youtu.be/t4YkMRC13u4?si=HX3c0RLfyTcji7Th


'에스메랄다'를 배우게 되다니.. 영광 그 자체였다.

첫 수업 날, '내가 탬버린을!!!' 하는 마음과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쑥스러움이 공존했다. 이미 다른 수강생들은 몇 달 전부터 배우고 있던 터라 탬버린을 들고 동작을 복기하며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머쓱하게 구석에서 가수 현숙처럼 탬버린만 흔들고 있었더니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처음 배우는 만큼 순서를 아주 차근차근 나갈 거니 부담 갖지는 말라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간단히 도입부만 배울 거예요." 하셨다. 프로들이 하는 에스메랄다에 포인트를 살리고, 부수적인 동작들은 최대한 간단하게 짰으니 금방 따라올 수 있을 거라고 자신감도 챙겨주셨다. 뭘 하든 간에 순서를 외우는 게 제일 먼저였다.


에스메랄다1.jpg 시작 자세

먼저 준비 자세를 배웠다. 겁에 질려 우두커니 서 있는 내 팔다리를 선생님이 목각인형처럼 움직여 자세를 잡아주셨다. 그리고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리면 준비 자세가 완성된다. 내가 탬버린을 머리 바로 위로 올리고 있으니, 선생님은 뭐 떨어지는 거 막으라고 탬버린 준 거 아니라며 당당하게 들고 있으라고 하셨다. 당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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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버린 찹찹하고 멋지게 뻗기

음악 시작과 동시에 쁠리에를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탬버린을 찹찹쳐서 멋지게 앞으로 뻗어야 한다. 3초도 안 되는 짧은 동작이다. 일단 지금 '멋지게'가 안되니까, 머릿속으로 '탬버린 치고 앞으로 뻗기.' 하고 외웠다. 선생님의 선 시범 후 내가 따라 했다. 시작 전에 뇌리에 '탬버린을 어떻게 치는 거지?' 하고 찹찹 치는 방법을 물어보지 못한 게 떠올랐다. 머리에 넣은 순서가 하얗게 날아갔다. 탬버린을 그냥 노래방에서 치듯이 '짤짤' 치고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나는 코를 먹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이거 아닌 거 같아요ㅠㅠ" 했다. 선생님도 웃음을 삼킨 뒤 "맞아요. 맞았는데..' 하면서 하나하나 고쳐주셨다. 동작에 조금 더 힘을 강하게 넣어야 한다고 하셨다. 탬버린은 흙 묻은 손을 털어내듯 치면 된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진짜 털듯 힘 없이 툭툭 치는 게 아니라 힘 있게 친 뒤 강렬하게 뻗는 것이 포인트였다. 단체 강습이니만큼 나만 봐줄 수 없는 노릇. 다른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동작을 하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해야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리고 배운 도입부만 수강생들과 함께 했다. 어색한 자세와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아아ㅏ..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에스메랄다.. 에스메랄다 첫 수업을 마치고 집에 걸어가면서 합리화를 시작했다. "그래, 에스메랄다도 처음부터 막 그렇게 매혹적인 캐릭터는 아니었을 거야. 격동의 삶을 겪으며 진화한 거겠지. 그 격동이 나한테는 지금인 거지! 거지? 거지... 거지 같아.." 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탬버린 든 거지를 탈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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