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메랄다를 배워보자 2
도입부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순서를 배워나갔다. 원래 음악 속도보다 배속을 줄이고, 순서도 흐름만 따라가도록 바꾼 터라 작품의 기둥만 세워놓은 수준이었다. 이게 작품반의 최선이라는 걸 배우면서 알았다. 수업의 패턴은 대충 이랬다. 구석에서 배울 순서를 짧게 배운 뒤, 다 같이 할 때 뒤에서 황급하게 얼레벌레 따라 한다. 마무리로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혼자 해보는 시간이 있는데, 그때 뒤에서 배운 순서 복기와 다음에 배울 동작을 예습하는 시간을 홀로 가졌다. 짧은 시간 습득해야 할 양이 많으니 버겁기도 했다. 선생님은 시범을 보여주시고 "이 동작을 세 번 반복할 거예요. 어렵지 않죠?" 했을 때, 진짜 쉬운 거 같이 보이긴 했다. "오, 네!!" 대답하고 혼자 해볼 차례. 솟으려던 내면의 용기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분명히 선생님이 하실 땐 분명 쉬워 보였는데, '잠깐..' 하며 생각하는 로댕이 되어버렸다.
정말 친절하신 선생님은 걸음마 떼는 아가 손 잡아주듯 하나하나 다 알려주고 고쳐야 할 점도 설명해 주셨다. 늘 "좋아요." "잘했어요." 하며 교정해 주시니 주눅 들지 않고 배울 수 있었다. 나도 아이에게 이렇게 대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반성했다. 친절한 인풋에 비해 나의 아웃풋은 형편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기계적 결함이랄까... 하체와 상체가 동기화가 안된다는 것이다. 발 순서를 열심히 외우고 팔이랑 같이 하면 사인펜 뚜껑 다른 거 끼운 것처럼 이상했다. 웃긴 건 상체, 하체 따로 하면 곧잘 따라 한다는 것. 상체의 주인도 나고 하체의 주인도 나인데, 왜 합체가 안 될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른 수강생과 진도를 맞춰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도 심했다. 늘 수업 끝나고도 머릿속에 웅장한 에스메랄다 음악이 계속 맴돌았고, 잠들기 직전까지 머리로 순서를 복기했다. 이게 의외의 장점이 있었다. 순서 외우느라 사사로운 잡생각이 머리에 들어올 틈이 없어 배우는 동안 정신이 맑아지고,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작품 흐름에 따라 기-승-전-결이 있듯, 나의 진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턴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머리로 복기하기엔 순서가 점점 복잡해졌다. 시간이 흘러 기승전결의 '전' 정도까지 진도를 나갔을 때, 밥로스 화가처럼 "참 쉽죠?" 하던 선생님도 이제 더 이상 쉽다고 하지 않았다. 머리로 되뇌는 수준으로는 감당이 안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청소기를 돌리다가 아이 방에서 타악기 세트를 발견했다. 예전에 유치원에서 졸업선물로 줬던 것 같다. 열어보니 역시나 탬버린이 있었다. 오호! 하고 거실로 들고 나와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대충 치우고 연습했다. 집안에서 찰찰 들리는 탬버린 소리가 좀 웃기긴 했지만, 일단 연습해야 뒤처지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외웠다. 연습하니 허접하게 치던 탬버린에 약간 자신감이 붙었다. 하교하고 돌아온 아이가 식탁에 있는 탬버린을 보고 "나 학교 가면 엄마 혹시 집에서 혼자 춤춰?" 하고 묻길래, 단호하게 "춤이 아니라 연습."이라 말해주며 이상한 엄마 같은 뉘앙스를 수습한 적도 있다. 덕분에 진도를 팍팍 나가서 드디어 다른 수강생들과 속도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진도를 맞추니 위기가 닥쳤다. 수업 마무리할 때 한 명씩 하는 시간. 나도 예외가 없었다는 점이다. 맨날 뒤에서 얼레벌레 춰서 마음이 편했는데... 이제는 내가 해내야 수업이 끝난다. 압박감은 끝이 없다. "안 할래요.""못해요."라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혼자 탬버린을 들고 연습실 중간에 서있는데 정말 울고 싶었다. 준비 자세를 하고 멈춰있는데 탬버린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들 나를 아기 에스메랄다 보듯, "괜찮아요!" 하고 응원도 하고 박수도 쳐주셨다. 거울 속 나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혼자 해보고 마냥 동작을 외운다고 능사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거울 속 나를 직면하니 완성도를 높이고 싶어졌다. 정확한 동작들이 모여서 작품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는 걸 알았다. 몸이 안 따라주니 매우 답답했다. 예전에 가르쳐 주시던 원장님이 떠올랐다. 그 원장님의 교육철학은 '모든 자세는 정확하게'였다. 발 모양, 간격, 골반의 방향 등 몸 마디마디가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기를 원했다. 안된다고 찡찡거리면 '안되면 되게 하라.' 하며 무소의 뿔처럼 밀고 나갔었다. 작품을 배워보니 그 철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필로 글을 쓰려면 제일 먼저 운필력부터 키우고 쓰는 법을 정확히 배워야 한다. 자음, 모음을 정확하고 또박또박 쓸 줄 알아야 조합하여 글자를 쓸 수 있다. 그 후에 단어를 배우고 나아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전달력이 생기는 것 같다. 만약 'ㄱ이나 ㄴ이나 어쨌거나 꺾인 건 마찬가지 아니냐' '나는 취미로 한글을 배우는데 그게 중요하냐.' 하며 대충 배우면, 단어는커녕 글자도 정확히 배울 수 없다. 발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정확하게 동작을 해내는 기본이 안되면 작품의 완성도가 바닥이 난다는 것을 내 눈으로 실감했다. 궁극적인 목표가 즐기는 것이어도 기본적으로 발전하는 내가 보여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처음 발레를 배울 때, 프로 발레단 연습 영상에서 무용수들이 학생들처럼 바와 센터를 매일매일 꾸준히 하는 걸 보고 '저 사람들은 그냥 바로 냅다 돌고 뛰어도 되는 사람들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작품을 배워보니 꾸준하게 기본동작부터 공을 들일수록 몸의 표현력이 상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발레를 할 때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게 되었다. 선생님이 작품반을 만든 학습목표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