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짓점 ( 부제: 푸른 레오타드의 전설)
작은 가슴 가슴마다
고운 사랑 모아
우리 함께 만들어봐요
아름다운 세상
유리상자의 '아름다운 세상'의 가사 中
나는 가슴이 없다. 원래 큰 편도 아니었다. 그냥 사는데 지장이 없는 안분지족 하는 정도였달까. 의도치 않게 13개월을 모유 수유하고 많이 시무룩해진 나의 가슴은 업장소멸되듯 미미한 볼륨도 잃었다.
처음 발레를 시작할 때, 레오타드 안에 이너웨어 브라탑도 챙겨 입었었다. 몇 번 입어보니 흉곽만 조여서 답답할 뿐 의미가 없어 이후로 쭉 레오타드만 입게 되었다. 날씨가 춥거나 소름 돋는 일 아니면 두드러지는 일이 없어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타드 중에 가슴 패드가 있는 것들도 있고, 따로 패드를 탈부착하는 것도 있지만 나에겐 사치다. 니플패치 정도가 딱 좋다. 예전에 어떤 수강생이 "속옷은 어떻게 챙겨 입으세요?" 하고 묻길래 "저는 안 입는데요." 하니 "아! 안 입으시는구나!!" 했던 적이 있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사투리인 ‘pirouelle’에서 나온 말로써 ‘제자리에서 돈다.’라는 뜻. 한쪽 다리로 몸의 중심을 잡고 팽이처럼 도는 ‘회전하는 빠’이다. 화려하고 인기를 끄는 스텝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삐루에뜨 [pirouette] (발레용어사전, 2011. 9. 5., 메디컬코리아 편집부)
피루엣을 위해 다양한 턴을 배운다. 피루엣은 대부분의 작품에 들어가는 동작이기 때문에 필수로 연습을 해야 한다. 처음 선생님이 턴을 가르쳐 주실 때, 유아 발레 클래스처럼 손 허리하고 몸 방향을 '하나, 둘, 셋, 넷'하며 동서남북으로 돌았었다. 그리고 "자, 이런 원리로 빠르게 도는 거예요." 하면서 선생님은 피융- 하고 돈다. 그럼 모두들 따라서 피융하고 돌려다 볼링공에 맞은 볼링핀처럼 난리가 난다. 안 돌아갈뿐더러 어지러움은 덤으로 받아 고통스럽다. 가끔 어떤 선생님은 그런 볼링핀들을 보고 '이게 왜 안될까?' 하며 다시 핑핑 도시는데, 우리 볼링핀들은 '와!!!' 박수를 치며'근데 저게 왜 될까?' 하며 선생님을 바라본다.
전문 무용가들이 몇 바퀴씩 턴을 돌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동작을 구사할 수 있는 핵심 중 하나로 스팟이 있다. 스팟(Spot)은 말 그대로 '점'이다. 턴을 돌기 전 머리와 눈으로 자기만의 초점을 잡고 한 바퀴씩 돌 때마다 다시 잡았던 초점으로 먼저 돌아오는 것이다. 그 초점만 잃지 않으면 더 안정적으로 어지럽지 않게 돌 수 있다. 평상시 내가 턴을 돌 때 너무 동태 눈깔인 상태로 돌아서, 이전 학원 원장님은 턴 도는 방향에 작은 개미를 그려놓으셨었다. 스팟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개미를 무서워하지 않아서 그런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초점 없는 눈을 보고 "개미를 찾아요!" 하시던 게 생각난다. 어느 순간부터 개미는 눈에 들어왔지만 몸 쓰는 법을 잘 몰라서 개미를 찾는 눈이 침침한 사람이 되었다.
바 수업 시간에 내 이름이 "등!!"으로 불린다면, 턴 연습 시간에는 "스팟!!" 으로 불린다. 한번 날을 잡고 선생님이 "몸 먼저 돌고 고개는 스팟에 고정하고 몸보다 빠르게 팟 돌아와야 해요."라고 시범을 보여주셨다. '아하!!! 고개는 나중에!!' 열심히 머리에 입력했다. 너무 고개를 나중에 돌렸나.. 아이 책에서 보던 올빼미가 된 기분이었다. 참고로 올빼미는 고개를 270도까지 돌린다. 내가 올빼미처럼 목을 막 돌리니까 "그거 아니에요!! ㅠㅠ 그렇게 돌리면 무서워요.. " 하신 적도 있다. 그렇다고 집에서 양말을 찾듯이 '스으팟을 찾아볼까~'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머리랑 몸이 세트로 같이 돌면 스팟은 커녕 멀미만 온다. '스팟 잡고 만다..' 하며 상상 속의 점을 딱 찍어 쭉 응시하며 몸 먼저 재빠르게 돌리고 '잡았다 스팟 요놈!!'하며 고개를 파박 돌려야 한다. 스팟을 보는데 실패할 때면 연습실 구석에서 벽에 난 못 자국이나 문의 경첩을 노려보며 연습 또 연습했다.
평상시에 맨날 입으로 '돌겠다.' 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피루엣을 돌려고 자세를 잡으면 '잘 돌 수 있을까?'로 바뀐다. 미쳐 돌겠는 순간들을 모아 모아서 턴 돌 때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 문득 '돌아버리겠네.' 하는 순간들이 올 때마다 피루엣을 하면 연습도 되고 좋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파랗고 조그만 자석이 있길래 냉장고에 붙이고 틈만 나면 그 스팟을 향해 돌았다.
방에서 아이가 부르면 "어~엄마 간다~" 하며 냉장고 스팟을 향해 돌며 발걸음을 옮겼고, 냉장고에 뭐 꺼내러 갈 때도 스팟을 향해 돌고 또 돌았다. 도어록 비번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피루엣 자세를 잡아서 현관으로 향해 돌았다. 흠.. 그래서 요즘 집에서 아무도 나 안 부르는 거였구나.. 돌고 또 돌았더니 집에서 신는 양말에 턴 돌려서 업 섰던 자리만 구멍이 났다. 스팟의 노력으로 난 구멍이라 혼자 뿌듯해 가족들에게 보여줬다. 그들은 반응이 없었지만, 난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동태 눈깔이었던 내 눈은 스팟을 찾기 위에 생명력을 찾아 생태 눈깔로 변했고, 학원에서 피루엣을 돌 때 성공률도 높아졌다.
레오타드를 잘 안 사는데 아주 오랜만에 나를 위한 선물로 파란색 레오타드를 산 적이 있다. 색깔 있는 레오타드를 잘 안 입지만 새로운 도전으로 샀었다. 새로 산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종종 입었는데 역시나 손이 안 가더라. 자주 입는 레오타드를 세탁 못해서 어쩔 수 없이 그 파란색을 입은 날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땀이 샘솟았고 파란 레오타드는 배꼽 주변부터 찐 파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위아래로 타고 올라가던 땀은 온몸으로 퍼졌다. 그러다 문득 제3의 시선이 내 몸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니플 패치의 동그란 부분만 땀에 젖지 않아 경계가 또렷해지고 있었다. 거대한 얼굴처럼 변하고 있는 내 몸통에서 낯익은 얼굴이 느껴졌다. '내가 이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그 생각에 선생님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다 '아!!' 하며 생각이 났다. 만화 스펀지밥에 나오는 문어 징징이를 아는가. 징징이가 사는 집!! 딱 그 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 배꼽에서 당장이라도 징징이가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았다. 집이 나랑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라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피루엣을 도는 시간. 스팟을 잡기 위해 거울과 마주했다. 망할 놈의 징징이 집에 시선을 뺏겨 스팟을 잡을 수 없었다. 정신 차리려고 시선을 돌려도 자꾸 눈이 마주쳤다. 또다시"스폿!!" "스팟!!" 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더 이상 수업을 엉망으로 들을 수 없기에, 입고 왔던 후드티를 위에 걸쳤다. 더워 죽을 것 같았지만, 눈앞에 징징이 집이 사라지니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땀을 줄줄 흘리며 수업을 들었다. 그 이후로 무조건 땀자국이 보이지 않는 검은색 레오타드만 입게 되었고 파란 레오타드는 옷장 속에서 오지도 않을 징징이를 기다린다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