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마스크 쓰던 시절에 마음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코로나가 한창이었다. 분주한 아침을 시작으로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덧 발레 갈 시간이 된다. 원장님이 수업 10분-20분 전에 미리 와서 몸을 풀라고 했지만, 한 번도 실행한 적이 없었다. 발레 하는 시간만큼 일 할 시간을 뺏기기 때문에 숨 돌릴 틈 없이 진짜 지금 안 가면 늦을 때까지 동동거리다 허겁지겁 나가기 때문이다. 가끔 일이 일찍 끝나는 날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일찍 나서지 않는다. 막상 가면 또 열심히 하면서 왜 이렇게 나서기 직전까지 가기 싫었을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뒤돌아서면 하교 시간이라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최선을 다해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학원을 다녔었다.
유치원 졸업식을 앞두고 확진자가 급증하며 아이 유치원에도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아이와의 집콕이 다시 시작되었다. 코로나 초반에는 집콕이 너무 힘들었는데 아이가 그 사이 자라서 그런가 이틀까지는 할만했던 것 같다고 잠깐 착각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7살 아이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엄마와 공존은 마요네즈 넣은 된장찌개 같았다. 한 냄비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희로애락이 열 번은 반복되고 마음이 미안함에 찌들어야 하루가 끝났다. 아침부터 밤까지 재잘대는 아이의 말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보물 같은 아이인데도 힘들어서 스스로 엄마가 맞나 자책했다. 어떤 날은 아이가 잠들고 조용해진 집 안이 너무 귀하고 짧다는 게 슬퍼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훔쳤다. 우는 와중에 발레가 너무 하고 싶었다. 고민을 하다 다음 날 원장님께 조용히 협조할 테니 아이와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나 전화를 했다. 원장님은 괜찮으니 함께 오라고 하셨다.
장난감과 책을 챙겨 함께 학원으로 나서는데 신나고 설레고 행복했다. 원장님은 아이 혼자 있을 공간을 마련해 주셨고, 나도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이 생긴다는 생각에 들떴었다. 기대와 달리 수업에서 외워야 할 것은 많고, 틈틈이 아이를 신경 쓰느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중간중간 연습실 근처를 서성이며 언제 끝나냐 채근하는 아이의 눈치를 보느라 동시에 체력과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을 체감했다. 그래도 엄마 따라 발레학원 가기 싫다는 아이에게 ‘네 입에게 주는 쉬는 시간’이라 생각하라고 협박(?)하며 꿋꿋하게 함께 학원에 다녔다. 집에 돌아가면 또 집콕 희로애락 사이클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피폐해진 심신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그때의 유일한 숨통은 발레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라앉고 있을 때 늘 손 내밀어 준 게 발레다.
마스크 쓰고 유치원 졸업도 하고 초등학교 입학도 했었다. 흉흉한 소문은 사실이었다. 정말 뒤돌아서면 하교 시간이 돌아왔다. 입학은 아이가 했는데 내가 앓아누워 발레도 쉬었다. 얼른 으쌰쌰 기운 차려 발레를 가고 싶었지만 서랍에서 고데기 꺼내다 발가락에 떨어뜨려 다쳐버렸다. 하필 발레 할 때 제일 많이 쓰는 부분이 쉴 수밖에 없었다. 연달아 계속 쉬니 다시 발레 가기 싫어졌다. 가기 싫은 데 가고 싶었다. 이유를 찾아야 했다.
첫 번째. 힘들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말해도 된다.
언제부터인지 힘들다는 말을 입 밖으로 못 하게 됐다. 그 당시에 친했던 사람들에게 스몰톡으로 '요새 이런 점이 힘들다'는 말을 하면 자석처럼 '아유 그게 뭐가 힘들어."라는 말과 함께 '전국 내가 더 힘들어 자랑대회'가 시작됐었다. 내가 겪는 고충이 위로는커녕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힘들다는 말을 꿀꺽 삼키다 체할 거 같아 그 인연들을 다 정리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 보면 그냥 인복이 없었던 시기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반면교사 삼아 타인의 힘듦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게 되었다. 발레는 하는 내내 힘들다. 너무 힘들어서 힘들다는 소리도 안 나온다. 발레 하는 동안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끝나고 힘들다 노래를 불러도 합법적(?)이라 너무 좋다.
두 번째. 내 이름을 불러주는 유일한 곳이다.
연고가 없는 여기는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를 일이 없을뿐더러(병원 가면 불러준다) 엄마, 아내의 태도와 사고를 장착하고 있어야만 조용하고 무탈한 삶을 살 수 있다. 발레 가면 누구나 내 이름을 불러준다. 내가 누구의 엄마인지, 누구의 아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발레 하는 동안은 온전히 나로 숨 쉬고 있다는 걸 느낀다. 학창 시절 명찰을 달고 다닐 때는 누가 내 이름을 부를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이제는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니.. 참 아이러니하다.
세 번째. 좋은 말을 많이 듣는다.
그때의 삶은 그냥 해야 돼서 하는.. 살아야 돼서 사는.. 연명하는 삶 그 자체였다.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까 봐 아슬아슬한 성냥개비로 쌓은 탑이 된 기분으로 살았다. 어른이 되어보니 그렇게 칭찬받을 일이 없다. 맨날 허둥지둥 대다 놓치고 다치고 해야 할 일도 제대로 완수 못하는 게 부지기수다. 그때는 플러스알파로 시가에서 뭐만 하면 섭섭하다, 서운하다 난리여서 억울함도 알파였다. 발레 실력이 형편없지만 클래스마다 원장님은 나아진 점을 항상 콕 집어 좋게 포장해 주셨다. 발레를 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누가 나를 보며 예쁘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겠나.
그렇게 이유를 찾아내고 발레를 다녀와서 나는 이렇게 적어놨더라.
하기 싫은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앞서 발레에 대한 마음을 챙겼다. 오로지 나를 위한 발걸음이라 홀가분했다. 힘들다는 핑계로 엄청 먹었어서 그런가 거울 속 마주한 얼굴은 보기 좋아지고 몸은 한 층 벌크업 되었다. 튼실하니 좋았다. 오랜만에 가서 외웠던 순서를 다 까먹었지만 몸이 기억하는 순서도 있어 다행이었다. 성인과 사람 대 사람으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어 순간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다친 발을 쓰면 안 되는 데다 순서를 자꾸 틀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시간을 많이 까먹었다.
틀리든 말든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송골송골 맺혀 흐르는 땀에 개운함도 느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 다시 집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숨 막혔었다. 좁은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일이 무섭다. 발레 하면 완전히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병이 생긴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발레를 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개나 찾아서 발레를 다녀왔나 보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훌쩍 타고 가서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그리고 가끔 또 발레 가고 싶은 데 가기 싫은 이상한 마음이 생긴다면 다시 이 글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