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발레 하는 쿠크다씨

땀고초려

by 쿠크다


지긋지긋한 여름이 가고 공기가 선선해진다. 수강생들이 워머, 가디건, 웜업 부츠, 등 각자의 웜업 도구를 착장 하기 시작하면 곧 날씨가 추워진다는 걸 의미한다.


처음 발레에 푹 빠져서 찾아본 발레단 연습 영상 속 무용수들은 옷을 다 겹겹이 껴입고 있었다. 그때는 그들의 발레와 나의 발레는 총량 자체가 다르니 딴 세상이라 생각했다. 왜 저렇게 입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한 해 한 해 발레를 하면서 아이템 추가되듯 다치는 부위가 히나 둘 씩 늘었다. 병원 신세 지는 몸뚱이는 모두가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챙길 수 있는 건 나뿐이다.'가 머리에 박혀 최대한 꽁꽁 싸매며 챙겨 입는다.


이제는 겹겹이 껴입은 무용수의 모습을 보면 '저들은 얼마나 부상과 마주하며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실력은 늘지 않고 부상만 느는 건지.. 이러다 나중엔 워머보다 붕대를 더 많이 감고 발레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학원을 바꾼 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니 아무리 싸매고 가도 걸어가는 동안 몸이 식어 금방 따뜻해지지 않았다. 웜업운동으로 움직여 열을 올리기까지 속도가 참 더뎠다. 추운 겨울 연습실에 가서 열을 내겠다고 막 파리처럼 팔다리를 비비다가 땀복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발레용품 쇼핑몰에서 웜업용 땀복을 사려고 하는데, '나 빼고 다 땀복 사 입었나 봐.' 할 정도로 멀쩡한 색깔과 사이즈는 다 품절이었다. 무난한 색깔을 원하는데 독특한 사이버틱, EDM 춤춰야 할 것 같은 색깔들만 남아 차마 고를 용기가 없었다. 창피하지 않을 정도의 색깔을 찾으면 사이즈가 없고 사이즈를 찾으면 입을 용기가 없는 색깔이고.. 찾고 찾다 결국엔 연습실에서만 입을 타협할 만한 색깔의 땀복 반바지를 찾아냈다.


반바지 땀복을 입고 처음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중세시대 왕자같이 늠름했다. 늠름한 건 좋은데 요즘 세상에 만나는 바로크는 어색했다. 어이쿠 하면서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고무밴드를 말았다. 그제야 왜 발레 전공하는 사람들의 땀복을 둘둘 감겨있는지 약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길이가 길건 짧건 발레리나들 땀복 바지 허리춤은 다 말아 접어 입더라.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싶어 선생님께 여쭤보니 너무 당연한 걸 물어봐서 대답이 딱 나오지 않는 표정이었다. 점점 더워져서 점점 말아내리는 것도 있고, 복근과 골반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 그렇게 입기도 한다고 했다. 직접 입어보니 본능적으로 모양새가 이상해서 말아 입는 게 더 근접한 거 같았다.


좌우지간 땀복의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골반 전체가 따뜻해지니까 고관절에서 나던 삐걱거리는 느낌이 많이 줄었다. 스트레칭도 더 잘 되고 다리 움직이는데도 훨씬 수월한 데다 몸 전체가 후끈해지니 땀도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개운했다. 덥다 싶을 때 한 번씩 바지를 말아 내리면서 프로인척 하는 느낌까지 덤으로 얻는 기분이었다. 반바지라 여름에도 부담 없이 입을 수 있어 중세 왕자는 신경 쓸 겨를 없이 땀복 반바지를 애착 바지처럼 입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반바지 땀복을 가지고 나니 긴 바지가 가지고 싶어 져 비수기를 노리고 있었다. 역시즌을 노리면 무난한 색깔의 알맞은 사이즈를 적당한 가격에 얻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고, 역시나 나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를 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땀복 바지를 받아 시착을 했는데 착용감이 이상했다. 분명 라지 사이즈로 샀는데 너무나 딱 맞는 것 아닌가. 쇼핑몰 상세정보 속 모델은 참 낙낙하게 입고 있던데.. 오배송도 아니었고 상세 사이즈 꼼꼼히 안 본 나의 탓도 있어 그냥 입었다. 원래 반품 환불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레깅스형 땀복이라 생각하지 뭐.' 하고 입기로 했다.


첫 개시하는 날. 땀복이 왜 넉넉하게 제작되었는지 바로 깨달았다. 땀복 자체가 흡수가 안 되는 비닐 재질로 되어있는데 사이즈가 타이트하니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땀 때문에 몸에 눌어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지 밑위길이가 너무 짧아서 가랑이가 너무 꼈다. 더워서 말아 내리면 뭔가 바지를 벗으려다 만 사람의 행색이 되어버렸다. 발레 하면서 마주하는 거울 속 내 모습은 늘 상상과 달랐기에… 이런 상황도 익숙할 법도 한데, 이 요상한 화장실 갔다 성급하게 나온 듯한 비주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바지를 벗어던지고 전공생처럼 레오타드만 입고 수업을 들었다. 느닷없는 개방감에 잠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라 여겼다.


또 선선해지는 밤공기.. 땀복 바지 사기 딱 좋은 날씨에 미련을 놓지 못한 나는 또다시 쇼핑을 했다. 마지막 땀복 바지 한 벌을 사면서 가랑이가 끼면 이 세상 땀복에 대한 모든 미련은 버리겠다 하는 마음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더해 구매한 바지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고 학원으로 향했다. 품도 넉넉해 허리춤 말아 내려 입기도 하고 다리는 말아 올려 입기도 했다. 오랜만에 성공적인 소비였다. 날씨에 상관없이 사계절 마르고 닳도록 입어 이제 내 애착바지가 되었다. 오래 나와 함께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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