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발레 하는 쿠크다씨

다시 만난 토슈즈 (1)

by 쿠크다


발레에 흥미와 열정이 생기면 제일 먼저 꿈꾸는 것이 토슈즈다. 어린이가 '나도 언젠간 어른이 될 수 있겠지?' 하고 꿈꾸는 것처럼, 꼬꼬마 발레리나가 토슈즈를 신으면 어른 발레리나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른 연습실에서 누군가가 토슈즈를 신고 웜업만 해도 멋져 보여서 문 밖에서 빼꼼 쳐다본 적도 있었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토슈즈와의 첫 만남. 참 설레고 행복했던 거 같다. 아이를 재운 뒤 깜깜한 밤 호롱불 아래에서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처럼 토슈즈 리본도 꿰매고 열심히 두드려서 길들이고.. 괜히 토슈즈 신는 날도 아닌데 학원에 들고 가서 '후훗, 여러분들 토슈즈 신는 나를 보세요.' 어필했던 거 같다. 토슈즈를 신고 앉아서 스트레칭했던(무슨 의미) 그때를 생각하니 참 부끄럽다.


내 인생에 토슈즈를 신을 기회가 세 번 있었다. 모두 한 달 이상 토슈즈를 신었던 적은 없다. 첫 번째는 중간에 이사 가서, 두 번째는 선생님이 수업을 안 해줘서, 마지막은 한 달을 채우려던 시점에 다쳐서다. 세 번의 토슈즈 입문의 시간을 되짚어보면서, 내가 토슈즈를 발에 신은 기간보다 리본 꿰매고 길들이느라 손으로 만진 기간이 더 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래건 길들이기도 아니고 이건 뭐.. 다 길들이다 끝났네.. 아무튼 내 손이 토슈즈를 신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번째 토슈즈를 배웠을 때, 부상으로 빠진 나를 제외한 나머지 수강생들은 계속 토슈즈를 신었냐. 또 그것도 아니다. 토슈즈를 신고 동작을 해내려면 기본기를 계속 수련해야 하는데 이건 솔직히 아프긴 오지게 아프고 재미가 없다. 마치 짜장면 만드는 법 배우기 위해 계속 양파를 까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아프고 지루한 그 길을 묵묵히 견뎌내는 힘을 키워야 하는데, 재미없고 아프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겼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의 흥미를 느끼며 가르치는 즐거움을 얻는다. 그들에게 권태기가 찾아왔고 결국 클래스는 사라져 버렸다. 이런 우여곡절을 보고 겪어서 그런지 '토슈즈를 신으면 사람이 아니다.' 하며 거리 두기를 다짐했다.


원래 신발에 흥미가 없다. 발레 할 때가 아니더라도 발이 불편한 건 극도로 참지 못한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예쁘게 차려입고 힐이나 구두를 신으면 발 너무 아팠다. 외출 한 내내 성격이 개차반이 된다는 걸 알았다. 입사면접, 데이트, 결혼식, 돌잔치 등등 개차반의 역사는 늘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 탄생했다. 편하다는 구 두고 나발이고 요즘 잘 나오는 밴드를 비롯한 온갖 아이템으로 무장을 해도 뒤꿈치에 피라니아를 달고 다니는 기분이 든다. 아무리 발레를 좋아한다고 해도 토슈즈는 정말 기피대상이 아닐 수 없다. 배워보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나의 꿈과 희망은 와장창 깨졌지만, 대부분의 취미 발레인들은 토슈즈에 로망이 있다. 이번 학원에서도 어김없이 작품반이 마무리되면서 수강생들이 토슈즈를 배워보고 싶다고 하나 둘 손을 들며 원했다. 선생님도 고민하다 장기적으로 천천히 배우면 나쁘지 않겠다고 하셨고, 그렇게 토슈즈 클래스가 다시 열릴 징조가 보였다. 그들의 로망을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있던 나는 나중에 따로 선생님께 토슈즈 수업은 듣고 싶지 않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발을 다쳤던 기억도 떠오르고 아픈 것도 싫고 어차피 토슈즈도 다 버려서 없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도 부상이 있었다면 추천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휴~ 이번에는 잘 거절했다.' 하며 안도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토슈즈도 거절 못해서 얼떨결에 신었던 터라 이번 거절은 정말 스스로를 칭찬할 만한 거절이었다.


며칠 뒤, 수업을 듣기 전 몸 풀고 있는데 원장님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토슈즈를 신었을 때 어떻게 다쳤는지 그리고 그 후 부상 부위 경과를 물어보셨다. 지금은 많이 나아져서 발레 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말하니 원장님은 나를 앞에 앉혀두고 일장연설을 했다. 토슈즈 수업하는 선생님이 발에 맞는 토슈즈부터 관리 방법까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수업할 예정이다. 국립 발레단에 있던 분이라 가장 최신 정보를 가지고 있어 배우지 않으면 아깝다. 정 슈즈를 신기 어렵다면 길들이는 방법이라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 하는 게 제안이었다. 경청하고 있던 속으로 '음.. 나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정말...' 했다. 하지만 다른 내면에서는 '길들이는 법만 배우고 신지 않으면 되잖아!! 너무나 합리적이야! 이참에 길들이기 마스터가 되어보자!' 하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렸다. 고민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일단 마무리했다.


머쓱하게 남편 주변을 배회하며 이걸 언제 말해야 할지 간을 봤다. “토슈즈 수업이 열린다네?” 하며 운을 띄웠다. 예전에 부상당하고 목발까지 짚고 다녔던 터라 남편은 '토슈즈' '부상'만 들어도 이제 학을 뗀다. 치료기간 동안 남편이 퇴근하고 살림하고 아이 케어하느라 너무 많이 고생했었다. 가만히 듣던 남편은 쳐다보지도 않고 "님아 그것을 멈추어다오." 했다. 잔뜩 쫄아있던 나는 "신는다는 얘기는 아니야. 원장님이 이렇게 차근차근 토슈즈에 대해 배울 기회가 적다고, 길들이는 법만 배워둬도 좋다고 하셨어." 했다. "신지도 않을 거면서 길들이는 법은 왜 배우려는 건데." 남편의 말은 백번 맞는 말이었다. "언제 신을지 모르니까 길들이는 법만 배워보자 뭐 이런 취지?" 하고 설득의 미소를 곁들여 말했다. 고민은 핑계고 사실 배워보고 싶었다. 최신버전 토슈즈 길들이기 얼마나 혹하는가. "진짜 길들이기만 하는 거다." 하며 남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허락했다.


배워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나니 토슈즈를 다 버린 게 생각났다. 선생님은 맞는 토슈즈를 찾아가는 과정부터 시작할 거라며 없어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멀어졌던 토슈즈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사실 토슈즈를 신으려면 발레샵에 가서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 신어보는 게 제일 이상적이다. 그러려면 비행기를 타야 되니 이번에는 선생님이 예전에 발레단에 있을 때부터 신던 다양한 종류의 토슈즈를 연습실에 펼쳐놓고 다 신어보는 시간으로 시작했다.

발레학원에 기존에 있던 토슈즈까지 합쳐 족히 스무 켤레는 넘어 보였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토슈즈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발모양과 사이즈를 확인해 가며 추천해 주셨다. 선생님이 수강생들이 수업시간에 발 쓰는 습관을 어느 정도 알고 계셔서 그런지 최대한 부상 위험이 적은 슈즈를 제안해주시기도 하셨다. 각 슈즈마다 장단점을 들으며 이것저것 신어보니, '이게 내 발에 편하겠다.' 하는 감이 좀 잡혔다. 한참의 피팅 끝에 다들 "이게 좋겠어!!" 하며 슈즈를 선택했다. 수강생 중 계획적인 한분이 나서서 총무를 맡아 온라인 주문 리스트를 쭉 적었다. 선생님은 "자! 배송이 완료되면 그때부터 차근차근 토 만들고 그다음 길들일 거예요!" 하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나는 '흠 그럼 나는 다음 수업까지만 듣게 되겠군!' 하며 속으로 토슈즈와의 거리를 단정 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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