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에서 발견한 음식들
먹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긴 연휴 동안 잦은 외식 탓인지 몸이 으슬거리기 시작했다. 몸살인 줄 알고 타이레놀만 먹고 버티다 뒤늦게 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 불을 늦게 끈 탓일까.. 속앓이를 하다 위경련이 와서 끙끙 앓았다. 다음날 내과에 갔는데 연휴 끝나서 그런지 대기가 너무 많아서 발길을 돌렸다. 미음과 죽만 먹으며 하루하루 보냈다.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을 땐 음식 냄새만 맡아도 명치가 아팠는데 지금은 나아졌는지 음식 사진만 봐도 식욕이 자극된다.
전에 과식하고 체한 느낌일 때 꾹 참고 발레를 갔더니 손 딴 것처럼 속이 나아진 기억이 있다. 아마 극한의 체력소모가 더부룩함을 내려준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열심히 발레를 다녔다. 정신없이 발레를 하는 와중에 음식이름이 귀에 들려와 눈이 번쩍 뜨이고 식욕을 자극해 집중을 할 수 없었다.
톰베(Tomber)
제주도에는 돔베고기가 있다. 도마를 제주도 사투리로 ‘돔베’라고 하는데 고기를 접시에 덜지 않고 도마에서 썰어내어서 돔베고기라고 부른다. 제주로 여행 올 때는 무조건 먹었던 것 같은데 살다 보니 흔해져 손이 안 간다. 국수 먹으러 갔을 때 사이드로 시키면 아주 환상궁합이다. 발레에도 톰베라는 동작이 있다. 실제로 톰. 베.라고 또박또박 말하지 않아서 거의 돔베라고 들린다. 순서를 설명 들으며 열심히 외우다 돔베가 들리면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도마 위에 잘 썰린 고기가 떠오른다. 외웠던 순서가 휘리릭 날아가버린다.
https://youtu.be/7HONEBLiS1c?si=jzAfrJczv7hUtLaf
톰베는 프랑스어로 '떨어지다'라는 뜻이다. 끌어올렸던 몸의 중심을 다른 쪽으로 바꾸기 위해 잠시 몸을 내려놓는... 마치 글의 접속사 같은 연결 동작이다. 바 할 때 바들바들 떨며 버티다 나타나는 잠깐의 톰베가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다. 할 때마다 무거운 상자를 들고 계단을 오르다 집에 도착해 다 왔다! 하며 상자를 턱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원장님은 쿵 하고 떨어지는 몸도 몸이거니와 그 마음가짐이 눈에 보인다고 하셨다.
그게 보인다니. 정말 몸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힘든 내색 없이 나무에 앉았다 날아가는 새처럼 살포시 톰베를 해야 한다. 무용수는 나를 보는 관객들에게 힘든 내색을 보이면 안 된다고 하셨다. 표정에서 모든 게 훤히 보이는 나는 원장님의 말씀을 들은 이후 (겉으로 보기엔 살포시 내려앉아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살포시 내려앉는 새다.’ 최면을 걸며 톰베를 한다.
퐁듀(fondue)
퐁듀라는 음식을 어릴 때 만화에서 처음 봤다. 되게 따듯하고 포근해 보여서 언젠가 꼭 먹어봐야지 다짐했던 기억과 달리 뷔페에서 초코 폭포에 찍어먹는 것 외엔 여태까지 제대로 된 퐁듀를 먹어본 적은 없다. 집에서 시도해 보기엔 눌어붙은 그릇 설거지가 생각만 해도 너무 귀찮기에 포기했다. 환상 속 음식으로 남기련다. 발레에도 퐁듀가 있다.
https://youtu.be/Ze9Cj0d2aCE?si=mA4I-uWil65JEKRy
퐁듀는 ‘가라앉다’라는 뜻으로 무릎을 옆으로 구부려 몸을 낮추는 동작이다.
할 때마다 서 있는 다리 안쪽 복숭아뼈쯤에 녹인 치즈 그릇이 있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발끝에 빵을 끼워 담가 앞사람 한입 옆사람 한입 뒷사람 한입씩 나누어 준다고 상상한다. 치즈에 퐁당 담갔다 빼는 느낌이 아니라 끈적끈적하고 묵직하게 푸욱 담그는 느낌을 내는 게 핵심이다. 다리 자체가 묵직하기 때문에 그 느낌을 내는 것이 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늘 동작이 로봇 같이 가벼운 느낌만 났다. 왜 그 묵직한 느낌이 나지 않을까 매번 고민이었다.
원장님의 시범을 보다가 원인을 알아냈다. 문제는 쁠리에였다. ‘무릎을 접었다 편다’에 정신이 집중된 것이 문제였다. 땅을 딛고 있는 축 다리가 같이 쁠리에를 하며 내려갈 때 진득하게 몸 전체를 내려야 했다. 정확한 쁠리에가 받쳐줘야 진정한 퐁듀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바 첫 순서로 정성을 다해 쁠리에 해놓고 퐁듀에서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이걸 인지하니 훨씬 동작이 부드럽고 묵직해졌다. 근본 쁠리에의 중요성을 이렇게 또 새겼다.
프라페 (Frappe)
프라페는 얼음, 커피, 우유를 베이스로 달콤한 재료를 갈아서 만든 커피음료다. 처음 프라페를 먹었을 때 뭐 이런 신세계가 다 있나 싶었다. 휘핑크림과 시원한 커피 쉐이크의 환상조합이 아주 고급진 더위사냥을 먹는 것 같았다. 시즌마다 새로운 맛의 프라페가 나왔을 때 꼭 사 먹어봤던 것 같다. 지금은 카페인 수혈용으로 아메리카노, 라테만 마시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이제 카페에서 프라페 만드는 갈갈갈갈 믹서가 갈리는 소리를 들으며 달콤함을 대리만족한다.
https://youtu.be/RikMpT_VFPw?si=_j-IY7o4tj0So6u6
프라페는 '치다, 부딪치다.'라는 뜻이다.
바 워크를 할 때 프라페는 퐁듀와 세트로 붙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음악이 잔잔하게 퐁듀로 나아가다 박자가 빨라지면서 프라페의 음악이 시작된다. 발끝을 서있는 반대 다리 발목(복숭아뼈)에 붙였다 떼는데, 붙였다 뗐다 하는 느낌이 아니라 치는 느낌을 내는 게 중요하다. 골반부터 무릎까지의 각을 유지한 채 무릎 아래의 발목과 발의 절도 있는 움직임이 포인트이다. 박자와 움직임이 굉장히 빠르다. 원하는 느낌을 살리며 폭 폭 다리를 뻗다 보면 온몸이 프라페를 만들다 고장 난 믹서처럼 난리가 난다. 다리가 프라페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상체는 의연함과 꼿꼿함을 유지해야 하는데, 내가 하는 프라페는 온 세상이 다 안다. 아마 학원 천정에 붙은 스피커도 알 것 같다.
다른 동작들도 음식과 관련된 단어들이었다면 좀 더 발레랑 빨리 친해졌을까. 아마 먹을 거 생각하느라 순서 외우는 게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다 보니 정말 딴생각을 많이 하면서 발레를 한다는 걸 느낀다. 속병도 다 나았겠다 이제 잡생각 그만하고 집중해서 발레 해야지. 그나저나 내일 발레 끝나고 점심으로 뭘 먹어야 잘 먹었다 소문이 날까~ ♬
*매주 금요일마다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