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반항아
발레가 너무 좋아서 한창 로망 가득한 사춘기 소녀처럼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발레’라는 단어 자음모음의 배치까지 사랑했다. 푹 빠져서 영상도 엄청 찾아보고 예쁜 발레 아이템 모으고, 냉장고에 다이어리 꾸미기처럼 멋진 발레리나 사진을 잔뜩 붙여 놨었다. 발레만 그려져 있으면 쓰레기라도 모을 기세였다. 아기자기한 소녀감성만 찾아왔다면 참 좋았을 텐데, 질풍노도의 사춘기 감성도 함께 찾아왔다.
냉장고 여닫으며 눈이 점점 높아졌걸까.. 단순히 좋아서 냉장고 꾸미기용으로 붙인 사진들인데 어느 순간부터 열고 닫을 때마다 사진 속 발레리나들이 '아라베스크 하는 멋진 나를 봐'하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학원 가서 마주한 발레 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 형편없어 보이는 건 당연지사. 높은 이상을 좇으려다 근육통을 얻고 관절을 다치고 발레를 한참 쉬면 또 몸은 퇴보했다. 괜찮아져서 수업에 가면 또 엉망인 점들만 눈에 들어와 화가 났다. 단단히 꼬여서 몸과 마음에 날이 잔뜩 서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비난과 잔소리를 퍼붓고 있다는 걸 알아챌 무렵, 성실한 반항아 정신이 필요했다. 일명 '어쩌라고 할 건 한다.' 전략이었다. 떠오르는 감정에는 '어쩌라고'하며 반항하며 몸은 '그래한다 해!'하고 하던 대로 움직이면 된다. 제일 먼저 냉장고에 붙여놨던 사진들을 '어쩌라고 내가 제일 멋지다.'하고 떼어버리고 아이의 식단표와 가정통신문이 다시 자리잡게 되었다. 학원에서도 동작이 엉망이라 마음에 들지 않아 속상하고 화가 나면 속으로 '어쩌라고, 이게 잘되면 발레단 들어가지 내가 학원 다니겠냐!' 생각했다. 이러는 정도면 발레를 그만 둘 법도 한데 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다녔다. 결석도 없이 꼬박꼬박 수업을 듣고 화가 난 채 집에 가면, 찜질도 하고 마사지하면서 날이 잔뜩 선 나를 다독였다. 배배 꼬이고 꼬이다 못해 엉켜버린 나를 풀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성실한 반항아는 시곗바늘처럼 움직였다.
바뀐 학원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강생끼리 눈에 보이는 친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전 학원에서 원장님과 같이 다니는 회원들에게 혼자 마음을 내주고 혼자 상처를 많이 받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수업 시작과 동시에 각자 자기 발레를 하고 끝나면 후다닥 흩어졌다. 처음 학원에 간 날, 인사를 하면서 반겨주던 분이 있었다. 그분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모두에게 사적인 대화 없이 인사만 하기 때문이었다. 학원에서 침묵을 고수하던 내게 가끔씩 툭툭 한 두 마디 말을 걸어줘서 그분이 오래 학원에서 안 보이면 걱정될 정도로 내적 친밀감이 쌓였다.
한 달에 한번 수강료 공지용으로 단체 카톡 방이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수강생 한 분의 결혼 소식이 톡 날아왔다.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원장님이 결혼 축하 겸 다 같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하셨다. 학원에서 모임 날짜가 정해지고 참석인원을 확인하던 중 나는 일정이 있어서 못 간다 알렸다. 인사만 나누던 그분이 "못 온다며? 꼭 왔으면 좋겠는데 아쉽네."라고 툭 한마디 던졌다. 챙김 받는 기분이라 기분이 좋았다. 모임 전날 갑자기 일정이 취소되어 운 좋게 학원 모임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사람들 만나는 자리가 생겨 신났지만, 말없이 발레만 하던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다.
각자 음식 하나씩 챙겨서 만나는 포트럭 파티였다. 결혼한 수강생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아쉽게도 주인공이 일정이 생겨 불참하였다. 원장님은 음료와 술을 맡아주셨고 나도 이런 파티 처음이라 디저트 할 요깃거리를 사 모임 장소로 신나게 향했다. 일찍 도착해서 앉아있는데 매주 보던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임에도 심장이 마구 뛰었다. 목욕탕에서만 자주 마주친 사람을 옷 입고 만난 느낌이랄까.. 이상하고 어색했다. 늘 실루엣이 다 드러나는 레오타드만 입고 대화 없이 발레만 하던 사람들과 멀쩡하게 입고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날 목소리를 처음 들은 분도 있었다.
혼란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맨날 벗은 몸만 보다가 옷 입은 모습을 보니 정말 이상하고 좋네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뭔가 변태 같지만 정말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에게 나누는 덕담이 "레오타드 입은 게 더 화사하고 예쁘다." "등이 드러나야 멋지다."이런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몸을 다 까서(?) 그런 걸까 어색한 시간은 찰나였다. 항상 얘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처럼 서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러다 인사만 하던 그분이 내가 외로워 보여서 꼭 왔으면 했다 말했다. 딱히 외롭지는 않았는데 혼자 고분군투하는 걸 들킨 것 같아 마음이 찔렸다. 그리고 혼자 고수하던 침묵 은둔인 콘셉트가 잘못된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이 나도 편안함을 느꼈는지 술을 마셔서 그런지 세상 헛소리는 다 하고 있었다. 밤이 늦어지자 아이의 '엄마 언제 와.' 독촉 문자가 시작되어 아쉬움을 안고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재미있는 자리였다. 좋아하는 것이 같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놀 수 있다는 걸 너무 오랜만에 경험해 행복했다.
이 구성원이 정말 쿨한 사람들이라는 건 다음 수업 때 또 느꼈다. 언제 모였었냐는 듯 다시 짧은 눈인사와 함께 아무 말없이 각자 발레에 푹 빠졌다 흩어졌다. 오히려 느닷없이 반항아가 된 나에게 이런 쿨한 분위기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이런 명확한 행동들이 심적으로 부담 없는 편안함을 만들어 발레에 대한 공감대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좋아하니까 잘하고 싶고 잘 해내야 하니까 무리하고 제 풀에 나가떨어져 다시 혼자 스트레스받는 이 무한 굴레. 그 모임이 마음속 반항아를 보듬어 주었다. 솔직히 발레에 오만정이 다 떨어지지 않고는 그 굴레를 완전히 멈출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잠시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또 굴레에 올라타고 있겠지. 그때는 어떤 것이 나를 잡아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