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노바
제주에 이사와 학원 찾아 삼만리 하던 시절… 원하는 학원 찾기 실패하고 폰으로 학원 검색하는 게 낙이었다. 남의 떡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온 동네 학원을 구경하다 친근해진 단어가 ‘바가노바’였다. 종종 보이는 ‘바가노바 메쏘드로 가르칩니다.’는 마치 타이어 가게 현수막에 쓰인 ‘우리는 정품 타이어만 사용합니다.’와 같이 대충 스쳐 지나며 봐도 알 수 없는 믿음을 주는 문구였다.
그 이후 원하는 발레학원을 찾고 1년 넘게 수업을 들은 후에야 배우고 있는 커리큘럼이 바가노바 메쏘드라는 걸 알았다. 왜 동네방네 소문내지 않고 가르치고 계셨는지 의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정품 타이어(?)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바가노바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발레 학교다. 이 학교 출신의 저명한 무용인이 많고, 볼쇼이나 마린스키 같은 유명한 발레단에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선망하는 러시아 발레 학교 중 하나다. 들어본 적이 없어도 웹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발레스쿨 사진들은 바가노바 아카데미 사진이라 아마 한 번쯤은 봤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바가노바는 사람 이름이다. 본명은 아그리피나 바가노바. 러시아에서 발레리나로 활동하다가 좀 더 명확한 교습법이 필요하다 판단했는지 자신이 졸업한 학교 러시아 황실 무용학교로 향한다. 발레 교육을 확립하고 이론화하겠다는 신념으로 [클래식 무용의 기초]라는 책을 냈다. 그 이후 이 교습법이 계승되어 '바가노바 발레 학교'로 명칭이 바뀐다.
그녀의 교습법은 '바가노바 메쏘드'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메쏘드는 신체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둔다. 미학적인 것보다 팔, 다리, 코어 얼굴 표정까지 다 아우르는 몸의 협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근력과 유연성을 키워서 부상을 최소화하는 것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이 메쏘드가 나오기 전에 그녀가 어떻게 발레를 배워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학적인 부분을 중점으로 두거나 지도자의 교습법이 중구난방이라 혼란스러워 총대를 멘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러시아 발레학교들은 입학 절차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바가노바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신체조건을 선별하기 위해서 의학적 검진을 통해 지원자들의 체형을 분석한다. 더 나아가 조부모 체형까지 확인해 2차 성징 후 유전적인 측면도 따진다. 이 바늘구멍을 통과한다고 안심하기 이른 이유는 여러 차례 실기 시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모두 거쳐서 선별되면 수준 높은 발레를 위한 피아노, 외국어 그 외에 다양한 학과 수업 등 수많은 교육과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많은 수업과 체형 변화를 비롯한 다양한 난관봉착으로 중도탈락하는 경우도 있어 졸업자가 입학생의 절반 혹은 그 이하라고도하는 소위 악명 높은 학교이다. 바가노바 메소드의 레벨은 총 8단계로 이루어져 8년의 양성을 거쳐야 한다. 8년의 혹독함을 견뎌내는 이유가 오로지 발레를 위해서라니….
https://youtu.be/c9GqkjzJGPM?si=ZihnplyMUY11Y3q6
위 동영상은 1학년부터 8학년의 그랑 바뜨망 동작 변화를 모은 영상이다. 동영상을 쭉 보고 느껴지는 점을 적어본다. 1학년 학생들은 곧은 자세를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한다. 아등바등 버티는 상체와 최선을 다해 뻗어 쓰려는 다리의 움직임이 마치 갓 헤엄치는 법을 배운 아기 백조 같다. 한 단계씩 올라가면서 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머리로 생각하는 게 동작에서도 느껴진다. 동작도 좀 더 자신감이 붙어 훨씬 주체적이다. 시선이나 손동작이 조금씩 체계가 잡히는 모양새다. 도도함이 후추 뿌리듯 톡톡 뿌려져 은은히 카리스마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4학년이 넘어가면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생겨난다. 태어날 때부터 발끝으로 서있던 것처럼 동작이 능수능란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동작 하나하나에 파워가 생기고 전체적인 모습은 부드러워진다. 외유내강을 몸에 심는 것이 저런 게 아닐까.
원장님이 종종 수업 중에 순서를 설명하면서 지금 배우는 수준이 바가노바 레벨 1이라고 강조했다. 그럴 때면 바가노바 학생이 된 것 같아 아주 잠깐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특별히 동작이 달라진 게 아닌데도 '바가노바 메쏘드'라는 이름이 붙으니 나 또한 특별해지는 느낌이었다. '레벨이 쭉쭉 올라서 이러다 입시시험 보는 거 아니야?' 하면서 주책도 떨어봤다. 하지만 늘었다 싶어 바가노바 레벨 1.5로만 올라가도 우당탕탕 난리가 나는 모습을 마주하며 '깨진 주책바가지가 또 샜구나...' 하며 저절로 겸손해졌다. 선생님도 꼬락서니를 보고 이마를 짚으며 다시 레벨 1로 낮추시기를 무한 반복 거의 3년을 레벨 1에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제자리걸음하다가 현타가 올 때 ‘대체 레벨 8까지 올라가는 학생들이 진정 사람이 맞나?’ 한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혹독한 배움 끝에 아름다움이 탄생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 그렇다고 내가 혹독하게 연습하겠다는 건 아니다.
바가노바에 입학은 못해도 기분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바가노바 레오타드'를 입어보는 것. 중, 고등학교 학년마다 넥타이 명찰색깔 다르듯이 바가노바도 레벨에 따라 레오타드 색깔이 다르다. 발레용품 샵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어서 사이즈 재고만 있다면 원하는 색깔로 구매할 수 있다. 예전에 기분 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 놨던 기억이 있다. 실력은 뒤로 젖혀두고 다른 색으로 입으며 나만의 바가노바를 졸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도! 이렇게 레오타드 새로 하나 사겠다는 큰 그림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