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파드 캬트르
공연 한 달 전, 브로셔 촬영 공지를 받았다. 원장님이 해마다 해왔던 공연 브로셔들을 보여주셨고 쭉 넘기며 보다가 순간 멈칫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검은색 레오타드에 앞머리 하나 없는 올림머리였다. 유아반이나 학생들은 귀엽기라도 한데 이건 미용실 거울 급으로 날것의 느낌이었다. 성인반은 인권보호(?)를 위해 증명사진이나 여권사진 받아서 넣으면 안 되냐 조심스레 여쭤봤다. 원장님은 단호한 말투로 사진 받아 쓰면 형평성에 어긋나고 통일성이 없다며 촬영 날짜에 무조건 참석하라 하셨다. 하라면 해야지 별 수 있나. 그렇게 학원에서 어린이들과 차례차례 순서를 기다리며 헤어젤 듬뿍 바른 올림머리로 사진을 찍었다.
인쇄된 브로셔 사진을 보니 사이즈도 엄지손톱만 한 게 눈에 띄지도 않았다. 확실히 모두가 같은 모습이라 정돈되고 보기 좋았다. 최근에 학원 정기공연 브로셔 사진 따로 내다가 ‘얘가 더 예쁘네. 쟤가 더 예쁘네.’ 하면서 사이 안 좋아지는 일을 겪은 지인 얘기를 들었다. 단호했던 그때의 원장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원장님도 몇 번 겪었던 게 분명하다.
의상도 전문 업체에서 빌려서 쓰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가지고 있는 기존 의상에 컨셉마다 장식할 소품 사서 하나하나 떼고 다시 붙여서 만드는 가내수공업이었다. 원장님이 수업 끝나고 밤새서 만드신다는 얘기를 듣고, 일손 보태고 싶어 댁에 찾아갔었다. 딱히 큰 도움은 안되고 먹을 것만 축내다 온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 밖에도 브로셔부터 무대 컨셉, 의상, 음악편집 등등… 홀로 고분군투하는 원장님을 어깨너머로 보며 열정적인 모습에 경외감이 들었다. 이 무대가 진짜 귀하고 중요한 자리라는 걸 많이 실감했다. 누가 되지 않게 하루라도 더 열심히 연습해서 나은 모습 보여야겠다 다짐했다. (n번째 다짐)
그렇게 다가온 공연날. 공연을 보러만 다니다가 출연을 위해 공연장에 가니 기분이 참 묘했다. 무대 뒤 분장실에 내 이름이 붙어있는 것도 신기했다. 분장하고 머리하고 거울 보니 예쁘기보다는 화려한 아수라 백작 같았다. 무대에서 이목구비 잘 보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다 같이 합을 맞춰볼 공간이 없어서 비상구 계단, 자판기 앞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연습했다. 무대 리허설이 시작되고 호명하는 소리에 무대에 첫발을 디뎠다. 서 있을 위치와 공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무대 위에 오르면 엄청 떨릴 줄 알았는데, 연습 덕분인지 앞이 깜깜해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런가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혹시 나 무대체질인가? 착각할 뻔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앞선 무대들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박수 비트에 맞춰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동공에 초점이 사라지고 손이 점점 스머프처럼 파래지고 있었다. ‘이러다 심장이 멈추려나보다..‘ 하려던 차에 무대에 올라갔다. 무슨 정신으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눈부신 조명이 불안을 멈추고 몸을 연습한 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끝을 향할 무렵부터 빛에 익숙해진 눈 안으로 객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 끝이구나.’하는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눈치 없이 일찍 찾아온 안도감 덕분에 막판에 대차게 틀려버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가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작한 무대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맞으며 끝났다. 커튼 뒤에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서있는 선생님들과 눈이 마주치니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대 오르기 전에 그렇게 심장을 흔들던 박수소리가, 마치고 나니 바다 바람 같이 시원하게 들렸다. 연습하면서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부분에서 틀려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선생님은 원래 공연이 그런 거라고 위로해 주셨다. 원래 그런 거라면 뭐 쿨하게 받아들여야지.
공연이 끝난 후, 오류를 잘 찾는 남편과 딸아이는 날 보자마자 “끝부분에서 틀렸더라.”하며 병 주고 약대신 꽃다발을 건넸다. 딸아이는 모아둔 돈으로 꽃다발을 사려고 저금통을 들고 동네를 돌다 꽃집들이 문을 닫아 못 샀다고 미안해했다. 첫마디에 긁혀서 열받을 뻔했지 뭐람. 우리 가족의 축하방식 참 독특하고 재미있어서 좋다. 같이 발레 수업 듣는 회원분들이 찾아와 주셔서 응원하고 축하해 주셔서 정말 고마웠다. 이렇게 공연을 통해 일상에서 나눌 수 없는 감정들을 짧은 순간에 가득 느끼고 나눌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아마 인생 통틀어 '잘했다. '멋졌다.'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은 하루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칭찬 한 번에 다 들으려고 지난 세월 그렇게 혼났나 보다…
열심히 연습하며 희노애락을 함께 해준 예쁜 멤버들, 당근과 채찍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 선생님과 원장님,
지치고 낙담할때마다 마음껏 기댈 수 있게 안식처가 되어준 우리 가족까지.
고마운 사람들이 함께 해 행복한 시간이었다.
잘 가라 파드캬트르. 멀리 안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