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발레 하는 쿠크다씨

벚나무는 아닌 걸로

by 쿠크다


벅찬 감동이 가득했던 공연의 막은 내렸다. 연습과 잘 해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속이 후련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계속하면 질리지 않는가.

예 질렸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공연 끝나고 당분간 발레를 하고 싶지 않았다. 발레음악, 튜튜, 발레 슈즈, 리본들과 거리 두고 안식월처럼 한 달을 푹 쉬면 다시 좋아하며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또 몸이 바로 굳어버릴 수 있기에 루틴처럼 학원을 등록하고 꾸준히 다녔다. 새로 열리는 작품반도 솔깃했지만 반려했다. 다음 작품반 듣지 뭐~ 하는 심플한 생각이었다. 가족들과 여행도 다녀오고 친정도 다녀오고 나름 실컷 환기했다. 늘 발레를 삶에 최우선으로 삼다가 잠시 뒷자리로 옮겨놨다. 예외일 줄 알았건만… 애정하는 만큼 빨리 질리는 성격이 결국 발레에도 적용되었다.


원래는 센터 수업 때 좌우 구분도 잘 못하고 순서 잘하는 사람을 눈동자로 커닝하며 근근이 수업을 버티는 편이다. 잘하는 회원들이 결석하면 그날 수업은 망한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공연 끝나고 첫 수업날 이상하게 왠지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울 수 있을 만큼 외워서 해보려고 아등바등했는데 선생님이 뒤에서 “오… 늘었어요!!” 하며 물개박수를 쳐주셨다. 진심 어린 칭찬에 고래가 될 뻔했다. 왼쪽 오른쪽 고민할 틈도 없이 연습했던 동작들이 무의식에 박혀 응용이 되는 느낌이었다. 공연 연습하면서 스페이싱을 체득해서 그런지 사람들이랑 부딪히는 일은 아예 사라졌다. 스스로 걷는 법을 막 깨달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직은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단계지만 이렇게 조금씩 나아진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런 면에서 공연하면 실력이 는다는 말이 이런 건가 보다.


공연을 통해서 나에게 대해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화려한 아름다움보다는 편안한 것에 마음이 더 끌린다는 것이다. 반짝이는 비즈가 박힌 공연의상과 화려한 메이크업보다 밋밋한 얼굴에 몇 년을 입어 늘어난 애착 레오타드가 내 눈에는 더 예쁘다. 모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의 벅찬 희열보다 수업 중에 혼자 연습실 구석에서 순서를 완벽하게 해내는 기쁨이 더 짜릿하다. 아무거나 다 좋다고 말하는 무색무취 인간에게 취향이 새로 생겨서 기쁜 한편, 이제 자진해서 무대에 오를 일이 없을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집에서 학원으로 걸어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서 있는 오래된 벚나무가 있었다. 너른 공영주차장 초입에 우두커니 서있어서 확실히 존재감이 있는 나무였다. 저녁에 지나다니며 볼 때는 무슨 나무인지 몰랐는데, 지난봄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고 벚나무인걸 알았다. 공연 준비하던 겨울엔 폭설로 눈꽃나무가 되어있더니 어느새 시간이 지나 벚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득 그 나무가 마치 내 인생에 자리 잡은 발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나무가 꽃 피고 낙엽이 지고 눈꽃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나의 발레도 우뚝 서서 사계절을 반복하며 자랄 것 같았다. 저녁마다 학원으로 촉박한 시간 때문에 헐레벌떡 뛰어가며 그 나무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 발레에 질린 감정도 서서히 희미해졌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야심 차게 밝은 색 새 레오타드도 샀다.(원래 검은색만 입는다.) 학원 방학 끝나고 첫 수업에 개시하려고 설레며 수업을 기다리는 나날이었는데… 학원에서 공지문자가 왔다. 으레 오던 공지와 다른 첫 줄이었다. 학원 폐원 안내문이었다. 너무 황당한 일이 일어날 때 “꿈인가?”는 드라마 속 인물들의 오버 떠는 대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이게 지금 꿈인 건가.”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당장 학원으로 전화하고 싶었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 참았다. 학원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한동안 질린 감정을 가졌던 마음에 죄책감도 몰려왔다.

학원에 가니 원장님과 수강생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원장님 건강 문제도 있고 여러 사정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는 얘기에 내가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사실 뻥치지 말라고 약간 떼를 썼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제일 먼저 생각난 게 벚나무였다. 내 인생에 발레가 뿌리내린 나무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뛰어다니며 건네던 안부 인사가 작별인사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참 많이 슬펐다.

근데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큰 마음먹고 산 레오타드를 입고 가면 학원이 문을 닫는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오래된 레오타드가 예쁘다고 했지만 새 거 싫어한다고는 안 했다. 이때부터였구나. 내가 작은 마음먹고 그냥 레오타드를 사기 시작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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