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발레 하는 쿠크다씨

나의 레오타드 이야기

by 쿠크다

수영복처럼 생긴 발레복을 레오타드라고 부른다. 처음 입었던 레오타드는 검은색 민소매 레오타드였다. 이렇게 오래 할 줄 모르고 스커트도 제일 저렴한 걸로 샀었다. 자기혐오가 심한 편이라 그런 건지.. 다른 사람들 레오타드 입은 모습은 괜찮았던 것 같은데 처음 연습실에서 마주한 내 모습은 한마디로 숭했다. 황급하게 스커트를 둘렀더니 그나마 봐줄 만했다. 수업시간 내내 수영장 샤워실과 풀장 사이에 하릴없이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도 민망해하니까 선생님이 내복 같은 까만 긴팔 티를 추천해 주셨다. 다음 수업부터는 민소매 레오타드에 긴팔 티를 입고 스커트 두르는 조합으로 입기 시작했다. 그 세트를 교복 삼아 마르고 닳도록 입었던 기억이 난다.


제주로 이사와 발레학원을 찾아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난생처음 무대에 올랐던 그때 무대 의상은 까만 민소매 레오타드와 검정스커트였다. 검정 스커트가 없다고 했더니 원장님이 아는 디자이너가 만든 고급 스커트를 학원에서 팔고 있다며 구매를 제안했고 거절을 못해 제법 비싼 가격에 구매했다. 맘에 드는 모양과 길이는 아니었지만 이미 사버려서 꽤나 오래 입었다. 시간이 지나 온라인으로 스커트를 몇 번 사보고 그때 눈뜨고 코베였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예쁜 스커트가 엄청 많았고 게다가 그 고오급 스커트보다 저렴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코가 욱신거린다.


또 다른 학원은 약간 레오타드 패션쇼를 하는 분위기였다. 예쁘게 입고 발레 하면 기분이 매우 좋은데 문제는 예쁘게 입고 발레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트레칭만 한 세월 해서 서 있는 시간보다 궁둥이가 바닥에 붙은 시간이 더 길었다. 손해 본 건 아니다. 그때 예쁜 레오타드가 이렇게나 많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온라인 발레샵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양말 사는 느낌으로 워머 랩가디건 등등 소소하게 구매하다가 큰 용기 내어서 두 번째 레오타드를 사고 (놀랍게도 그 학원도 사라졌다.) 이후로 여러 개를 장만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것저것 사보면서 알게 된 것이 레오타드는 규격화가 되어 있지 않아 브랜드마다 사이즈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라지 사이즈인데 어떤 건 크고 어떤 건 작고 가끔가다 딱 맞고... 덕분에 다양한 사이즈의 입지 못하는 레오타드를 갖게 되었다. 레오타드는 Girth 거스 (*테두리라는 뜻의 어깨부터 가랑이 사이 몸통 둘레)를 기준으로 사이즈 정보를 꼼꼼히 잘 읽고 사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걸 왜 내가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거 저거 따지는 게 귀찮아 운 좋게 몸에 맞았던 브랜드 딱 그것만 사기로 결심했었다.

이번엔 또 같은 브랜드인데 반팔, 긴팔, 캐미솔 디자인마다 또 사이즈가 미묘하게 달랐다. 레오타드 좀 사보겠다는데 마트료시카에 갇힌 기분이었다. 번거로움과 귀찮음이 점점 거대한 장벽이 되어 레오타드를 웬만하면 잘 사지 않는다. 근데 또 이상하게 발레학원 방학을 하면 그렇게 레오타드가 사고 싶다. 발레 못하면 몸에 특이 호르몬이 도는 건지 온라인 발레샵을 들락날락거리다 꼭 한벌씩 사게 된다. 이러는 이유는 차차 알아가 보도록 하겠다.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완성된 두 가지 나만의 구매 규칙이 생겼다. 첫 번째는 무조건 민소매다. 반팔이건 긴팔이건 팔 달린 건 나와 함께 하지 못한다. 가뜩이나 타이트한 세상, 발레 좀 하면서 행복하려는데 어깨와 팔이 옥죄이니 너무 갑갑했다. 요즘은 약간의 관용을 베풀어 반소매까지 허용하기로 했다. 두 번째는 우리 집 통돌이 세탁기에서 살아남을 강인함을 갖춰야 한다는 것. 사람 나고 레오타드 났지 레오타드 났고 사람 났나. 새 레오타드에게 "반갑다. 살아남을 거라 믿어." 응원하며 통돌이에 넣고 세탁한다. 다행히 아직까지 나약했던 레오타드는 없었다.


지난가을, 옷장을 정리하면서 레오타드도 같이 정리했다. 발레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가니 레오타드가 제법 많았다. 강인한 나의 레오타드 군단이 소중한 발레를 잘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든든했다. 든든한 김에 어벤저스 슈트처럼 입으면 막 턴도 잘 돌고 점프도 잘하게 도와줬으면 좋겠다. 옷장 속 레오타드들아 읽거나 듣고 있니. 발레 잘하게 도와주면 내가 손빨래할 의향이 충분히 있다는 걸 알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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