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발레 하는 쿠크다씨

사라진 커닝 페이퍼

by 쿠크다

발레 수업은 보통 매트-바-센터 순서로 진행된다. 나의 체력과 집중력은 마치 촛불 같다. 매트에서 예열한 뒤 바 순서에서 아주 잠깐 빛을 내고 누가 후~ 분 것처럼 센터에서 사그라드는 편이다. 센터 수업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자 꼼수는 같이 수업 듣는 잘하는 회원님들이었다. 앞에서 먼저 시범을 잘 보여주는 덕분에 외우기 수월했고, 비록 얼렁 뚱땅이지만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팔다리 보다 눈동자를 더 많이 굴리느라 동작이 이상해도 거울 속 나와 마주치지만 않으면 장땡이었다. 과정은 모른 척하고 끝낸 것에 의의를 두고 살았다.


그 잘하는 시범조 같은 분들도 같은 학원 다니게 되어 안도했건만 그들은 저녁반이었다. 직장인이 일 끝나고 발레 하는 건 당연한데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동아줄 같은 회원들이 사라진 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바 클래스 마치고 바를 한쪽으로 옮길 때부터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너른 연습실만 마주해도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마음을 안정시킬 타이밍도 없이 시작되는 수업은 불안에 불을 지폈다. 원장님이 아무리 쉽게 설명하며 가르쳐주셔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매번 대차게 말아먹는다. 수업이 끝나고 마주한 내 얼굴은 우울한 호랑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파리하고 그늘졌다. 그동안 커닝 중독자로 살았다는 걸 한번 더 자각했다. 저녁 수업 때 표정이 밝았던 또 다른 이유가 마음 편하게 하는 커닝 때문이었나 보다.


좌절하고 낙담하고만 있기엔 너무 빠르게 다음 수업이 찾아왔다. 이럴 때는 빨리 자문자답을 하며 길 찾기를 시작해야 한다. 발레를 그만둘 것인가? 아니오. 매트와 바까지만 하고 집에 갈 수 있는가? 아니오. 저녁반으로 옮겨 커닝을 지속할 수 있는가? 아니오. 낙담한 얼굴을 하면 원장님이 발레를 레벨을 낮추는가? 아니오. 그럼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동작을 빨리 습득하는 것. 여기서 턱 멈춰버렸다. 그걸 못해서 이러고 있잖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동작을 빨리 머리에 넣으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 바 순서는 잘 외워 따라 하면서 센터 순서를 기억 못 하는 걸 보면 아예 능력치가 없는 건 아니라 판단했다. 체력저하가 가장 큰 원인일지도 모른다. 해결방안을 고민하다 아침 등산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이 학교를 데려다주려면 어차피 운전해야 하니 가는 김에 근처 얕은 산 하나 타면 딱이었다.

첫날 볕에 타기 싫어 꽁꽁 싸맨 내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도적 같다 놀렸지만 산에 가니 평범 그 자체였다. 아침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맑은 새소리 화창하고 푸르른 기운에 매혹되어 그때부터 매일 아침 산으로 향했다. 상쾌한 기분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한 번에 체력을 다 써서 이제 바 순서까지 까먹는 사람이 되었다. 학원에 맨날 퀭한 모습으로 나타나니 “오늘도 아침에 운동했어요?”가 인사말이 되었다. 체력이란 게 늘긴 느는 걸까 의심할 힘까지 사라져 오히려 머리는 맑아졌다.


생각할 힘까지 싹 빠진 어느 날, 원장님이 가르쳐주시는 동작을 그림자처럼 뒤에서 따라 하고만 있었다. 그날도 뭘 외우고 자시고 할 힘이 없기에 몸으로 따라 하는 시늉이라도 냈던 것 같다. 준비자세 하고 음악이 들리는 순간부터 내가 엇비슷하게 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원장님의 음악 따라 동작을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엔 불안에 떠느라 정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원장님이 가끔 머리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으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셨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솔직히 당장 순서 외우느라 귀담아듣지 않았다. 바닥난 체력 덕분에 머리를 비우고 몸으로 익히는 법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폭우가 오지 않는 한 한 계절을 꼬박꼬박 아침 등산을 다녔다. 한번 무언가를 시작하면 마무리 못하는 성격이 참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날다람쥐라는 별명이 붙을 때쯤 무릎을 다쳐서 아침 등산은 막을 내렸지만 곧 다가올 봄에 다시 시작해 볼 예정이다. 저번엔 체력이 느는지는 미처 확인을 못 했기 때문에 이번엔 꼭 오래 해보며 느껴봐야겠다.

누군가가 만약 동작이 잘 안 외워진다 고민한다면 뇌 빼고 그냥 따라 하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나처럼 등산하지 말고.







작가의 이전글70 발레 하는 쿠크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