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발레와 저녁 발레
딸아이 7개월 무렵쯤이었나.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주말에 한번 있는 문화센터 오전 수업을 가려면 할 일이 많았다. 오래 모유수유를 했기에 수유텀도 조절해 놓고 이유식에 소소한 집안일까지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아이와 남편 둘만 남겨두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이건 진짜다. 현관 나서기까지 어찌나 발걸음이 안 떨어지던지… 이건 거짓말이다. 무너지면 다녀와서 해결하자는 심정으로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유모차, 아기띠, 거대한 기저귀 가방 없이 혼자 걷는 길거리는 보도블록 하나하나가 나를 위해 깔린 레드카펫 같았다.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며 걷느라 기미가 좀 늘었지만 햇살 훈장이라 여겼다. 잦은 가족행사로 출석보다 결석이 많았던 문화센터 수업은 두 달쯤 겨우 버티다 막을 내렸다. 정말 발레 기분만 냈다.
이후 육아 우울증 정점을 찍는 아내를 위해 퇴근 후 육아를 자처한 남편 덕에 다시 학원을 등록해 저녁반 발레를 하게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깜깜한 밤 달빛 아래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발레의 참 맛에 빠지는데 한몫했다. 한 번은 수유텀 계산을 잘못해 수업 중간에 집에 가야 했던 날이 있었다. 그때 신데렐라가 열두 시 땡 치고 집에 가면서 ‘젠장… 마법 풀리네…’ 하며 김 빠졌을까 아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을까 고뇌하며 집으로 향한 기억이 난다. 이후 거처를 옮기고 다시 낮과 밤을 오가며 이어갔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전에 다녔던 학원 성인반이 사라지면서 지금의 학원으로 옮겨졌었다. 그때 나 포함 세 명이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한 분과는 계절마다 한 번씩 만나 당신의 발레는 안녕하신가 안부를 나눴다. 만날 때마다 이야기는 늘 비슷했다. 그분은 새로운 도전으로 운동의 종류가 종종 바뀌었지만 회귀하듯 발레로 돌아가는 삶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학원을 옮겨 발레를 이어가던 터라 맨날 그 스토리를 듣는 역할이었는데 학원이 문 닫게 되니 이제 동병상련 처지가 되었다.
떠돌이가 될 준비를 하던 차에 희소식이 들렸다. 흩어졌던 회원 중 또 다른 한 분이 사람들을 모아 전에 다녔던 원장님께 수업을 다시 열어달라 연락을 한 것이었다. 수업이 다시 열린다는 얘기가 내 귀까지 닿았고 흩어졌던 셋은 원래의 원장님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많이 동경했던 원장님이었기에 이렇게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어 그저 기뻤다. 아침반 저녁반 수업이 열렸고, 가족들은 전부터 내가 밤에 나가는 게 걱정도 되고 빈자리가 컸다며 아침반을 가길 추천했다.
아침으로 학원을 옮기고 일상의 판이 바뀌는걸 어느 때보다 실감하며 살았다. 전날 잘 먹고 땡땡 부은 몸을 발레음악으로 깨우고, 정신없이 우당탕탕 발레 하면 어느새 연습실에 햇살이 촥 들어왔다. 땀범벅이지만 창 밖을 보면 눈과 마음만은 뽀송하고 개운했다. 문제는 이제 남은 하루였다. 요일마다 안정적으로 분배되었던 할 일들이 갑자기 자리 잡은 발레 때문에 이리저리 밀렸다. 근육통과 밀려오는 피로를 가득 안고 하루를 버티려니 오후 두 시만 되어도 다크서클이 짙게 깔렸다. 기운 없어서 싱크대 아래에 쪼그려 앉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아침 발레는 신용카드랑 비슷하다. 행복 발레를 땡겨 쓰고 남은 체력으로 갚아나가는 일상이랄까.
결석한 수업 보강하느라 저녁 수업을 다녀온 날, 남편은 내 얼굴을 보더니 “당신은 저녁 수업 다녀야겠다.” 한마디 했다. 밝고 신난 게 얼굴에 확 드러난다는 뜻이었단다. 팔랑귀가 거의 코끼리 급인 나는 그 말에 혹해서 바로 다음 달에 저녁으로 수업을 옮겼었다.
오랜만에 저녁 발레수업은 한마디로 체크카드 같았다. 빼곡했던 일상을 보내고 남아있는 체력을 닥닥 긁어 잔액 삼아 행복 발레를 산다. 집중력이 바닥난 채 수업을 들어서 아침보다 눈꺼풀이 무겁고 동작에 힘이 딸리는게 단점이었다. 그렇지만 집에 가서 남은 할 일은 씻고 폼롤러 하고 잠들면 땡이라 심신의 부채감이 제로다. 그러니 얼굴이 신나고 밝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체크카드 같은 저녁 발레는 집안에 사정이 생겨 얼마 못 가 막을 내렸다.
결국 제휴사 할인, 포인트 적립 같은 추가 혜택도 없이 다시 신용카드 아침 발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 방학이 시작되면서 아침 발레마저 반납할 뻔했지만 간신히 잘 지켜냈다. 요즘 코에서 흐르는 게 콧물인지 코피인지 모를 정도로(읽어주신 분들 감기 조심하세여) 정신없지만 발레가 일상에 남아 안도하며 산다. 예전엔 아이가 자라면 발레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점점 더 늘어날 줄 알았다. 웬걸 가족들의 삶에 내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시간도 정비례로 늘어나 쥐어짜야 겨우 발레를 할 수 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발레도 기회의 신처럼 놓치면 영영 떠날 수 있기에 있을 때 잘 잡고 있어야 한다.
어서 방학이 끝나 아침 발레에 체력을 왕창 땡겨쓰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