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나라한 진실을 알려주는 기관이 입이 아니라 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시점부터, 난 다른 사람의 눈을 잘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도저히 그것을 바라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감정과 일치하는 표현을 하는 사람의 눈은 그나마 괜찮다. 다양한 감정에 맞춰 눈 역시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 느끼고 생각하는 바와 다른 얘기를 하는 눈을 보게 되면,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누군가는 싫은 티를 내지 않고 해내는 게 어른의 미덕이라지만, 난 지금도 그게 너무 어렵다.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갖가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출근하는 직장인을 생각해 보자. 그는 새벽에 울리는 단조로운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사실 한 시간 전쯤 깨어났지만 뒤척거리며 누워있던 그는, 옆 방에서 자는 아이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잽싸게 중지 버튼을 누른다. 뻗은 팔 주변으로 싸늘한 공기가 흐른다. 이불속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온도에 불쾌함을 느끼며 그는 다시 팔을 거두어들였다. 이불속 안락과 이불 밖 현실, 그 사이의 미지근함 따위는 없다. 그는 겨울 바다로 들어가기 전 몸을 푸는 다이버처럼 기지개를 켠다. 반 수면 상태에 눌려 있던 우울감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가 우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주말 동안 막내를 돌보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 것, 먼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 외 기타 등등. 현실로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고 싶어 휴대폰을 열었는데, SNS 메시지가 도착한다. ‘젠장. 백팀장 이 새끼는 잠도 없나?’ 곧이어 다른 팀원들의 답변 메시지가 쉬지 않고 도착한다. 그리고 그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채팅창에 글자를 입력한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출근하시자마자 상무님께 보고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지시한 업무를 월요일 오전에 보자는 말은 주말도 일하라는 의미인가? 그는 지난 금요일에 늦게까지 야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회사에 도착한 그가 오늘 하루 겪을 일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 백팀장은 그가 작성한 보고서의 실수를 지적할 것이다. 수요분석 방법의 적절성,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논리적 흠결 같은 것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사이시옷 넣기, 문장 띄어쓰기에 관한 지적이 대부분이다. 과거에도 보고서 내용에 관한 피드백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어서 새삼스럽진 않지만, 세월이 흘러 맞춤법이 변한 것도 모르고 저격하는 모습은 정말 어이없다. 반론하고 싶은 마음이 살짝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포기한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고, 무엇보다 업적평가 시즌이기 때문이다. 백팀장의 말을 듣는 그의 손은 수첩 위를 내달리지만, 마음은 이미 딴 곳에 있다. 백팀장의 지적이 끝나자 그는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이 지적해 주지 않으셨으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바쁜 오전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 자신의 딸이 유명 특목고 입학시험에 통과했다는 선배의 말을 듣는다. “너무 잘됐네요. 축하드립니다. 나중에 서울대 가면 꼭 크게 한 턱 쏘셔야 해요!”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학원 테스트를 통해 최하위 반에 배정된 아들이 떠오른다. 벌써 세 번째로 옮기게 된 학원이다. 식사 후 흡연실에서 만난 동기에게 선배의 소식을 전한다. “요즘 외고는 한물간 거 알지? 대학 진학할 때 이공계 학과 지원이 어렵고, 경쟁도 너무 심해서 적응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 그래도 그 외고는 SKY 진학률이 높다는 동기의 말을 듣고 그가 말한다. “요즘 SKY 졸업해서 노는 애들 천지야. 어문계열 같은 데 졸업해서 뭐 할 건데?”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하루가 지났다. 잠시 빳빳해진 목덜미를 풀고 있는 그의 눈에 시계가 보인다. 8시 42분. 올드보이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인간. 하지만 오대수를 비난할 마음은 없다. 그는 오늘조차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업무가 끝나려면 멀었지만,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다. 저녁은 상갓집에서 먹으면 된다. 상갓집에 도착해 보니 익숙한 얼굴이 꽤 많이 있다. 인사팀장의 부인상답게 다들 얼굴도장을 찍으려고 온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부의함에 넣었다. 이번 달 카드값을 생각하면 좀 부담스러운 금액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는 힘 있는 사람이고 자신은 올해 승진심사 대상이기 때문이다. 빈소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과 이야기 중인 인사팀장이 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운 후 큰절을 올렸다. 딱히 고인의 사진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영정 사진 속에 있는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라 할지라도 그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맞절 후 일어서서 대면한 인사팀장의 얼굴에 ‘누구지?’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그는 서둘러 자기소개를 했다. 인사팀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한다. 잘 모르는 사람이 문상을 와서 미안했는지 인사팀장은 직접 그를 접객실로 인도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앞쪽으로 갖가지 반찬과 육개장이 놓인다. 배가 너무 고파서 빨리 밥을 말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맞은편에 앉은 인사팀장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빈소 쪽을 흘끔 돌아봤는데 새로 온 조문객도 없다. 잠깐의 침묵 후 인사치레로 건넨 말에 인사팀장은 장황한 설명으로 답한다. 부인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치료 과정은 얼마나 길고 힘들었는지, 부인이 쓰러진 모습에 당황하여 119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던지 하는 쓸데없는 얘기였다.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한테 하는 얘기로는 적절하지 않았지만, 그는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묵묵히 들었다. 한참 얘기하던 인사팀장이 갑자기 훌쩍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의 입은 힘내시라며 얘기하고, 그의 눈은 식어가는 육개장을 보고 있다. 아 짜증 나!
인사팀장이 떠나고 그는 육개장을 먹으며 알 수 없는 우월감을 느꼈다. 사실 ‘알 수 없는’ 우월감은 아니었다. 자신을 돈 벌어오는 기계쯤으로 여기는 부인이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게 고마웠다. 언제 그가 인사팀장을 상대로 이런 우월감을 느껴보겠는가? 분명 인사팀장의 부인은 병으로 죽었지만, 그건 가정을 챙기지 않은 인사팀장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아놓은 속옷이 없어서 아침 출근길에 쩔쩔매는 인사팀장의 모습을 상상한다. 고소하다. 옛다! 부의금으로 속옷이나 사 입어라.
그가 겪은 하루가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인간의 이중성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역겨운 동기와 추악한 생각은 일상 어디서나 넘쳐난다. 이런 상황이 무성영화로 만들어지는 상상을 해본다. 영화 속 배우들이 말하는 단어는 자막으로 치환되어 의미가 생기고, 풍부한 표정과 결합하여 전달력을 증폭시킬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막으로 가려도 눈빛만큼은 감출 수 없다.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눈빛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눈빛까지 연기하는 배우에게 찬사를 보내게 되는 진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