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by 윤현섭

첫인상은 중요하다. 앞에 앉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방을 고르게 될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보통 난 누군가를 만나면, 세 가지 방중에 하나를 골라 그(녀)를 집어넣는다. 이방인이 내 마음의 방에 들어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종잡을 수가 없다. 말 그대로 Case by Case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는 거의 상대방을 보자마자 방에 집어넣곤 했다. 주로 시각적인 모습에 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는 나의 과감하고 가차 없는 선택이 멋있게 느껴졌다. 말하자면 시간이 흐르며 쌓이는 데이터와 경험적 판단보다는 감을 믿었던 것이다. 명확한 호불호가 감정에 더 솔직한 거라며 착각하던 그 시절, 긍정과 부정의 방은 항상 손님들로 넘쳤고 보류의 방은 텅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긍정과 부정의 경우 뒤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긍정은 빈번한 만남을, 부정은 철저한 외면을 불러왔다. 내가 아쉬울 게 전혀 없다는 편협한 사고방식은 좁은 인간관계를 만들었다. 부정의 손님들과 교류하며 겪는 불편함과 관계를 개선하고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사회로 진출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문득 명확한 호불호가 흑백논리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보류의 방은 북적였고, 긍정과 부정의 방 손님들이 방을 옮기는 경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기준(기준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감이지만)에 따라 분류해 놓은 사람들을 재분류하는 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난 짜증스러웠다. 지금까지 적용해 왔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새로운 판단 기준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웠던 나는 물리학 법칙과 같은 관계의 법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마법 같은 법칙은 없었고, 세 방의 손님들은 꽤 자주 들락날락했다.

긍정에서 보류로 바뀐 경우는 그나마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누군가에게 쏟는 시간과 노력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법이니까. 사람을 만나는 행위가 마냥 즐거운 나이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그건 한쪽만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절실한 쪽에서 감정의 수문을 활짝 열고 파도를 만들어 보내도, 먼 사막 가운데에 있는 상대방은 머리카락 한 올도 젖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 긍정에 있던 사람이 부정으로 바뀌는 경우였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보다도 못한 상황이 생기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특히 감정의 수문이 아직 열린 상태라면 더 난감했다. 서서히 문을 닫아 방수량을 조절할 새도 없이 배출구가 막혀버리는 느낌이었다. 흘러갈 방향을 잃은 감정은 여기저기 범람하기 시작했고, 생활 곳곳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모든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던 나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조정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면 조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선을 넘은 사람들에겐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고, 그저 철저한 무시가 가장 무거운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난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누구나 결핍은 있게 마련이고, 보통의 사람들은 그 결핍을 폄하하는 방법을 통해 마음속 깊게 자리 잡은 부조화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 예로 돈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돈을 갈망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돈과 관련하여 짐짓 의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의 고립은 관계의 결핍을 감추기 위한 자발적 선택이었다. 상처받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아예 제로로 만들어 버리는 비겁한 선택. 어떤 사건을 계기로 소중한 친구를 잃을 뻔한 경험이 있다. 당시 잔뜩 꼬여버린 관계를 보며 난 친구와의 관계를 칼로 끊어 버렸다. 명분은 거짓말이었지만, 사실 나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그저 진심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우위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고, 오히려 절대적인 열위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에 도망을 선택했다. 다행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지만, 가장 진실해야 하는 순간에도 난 모든 것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과거의 진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감추느라 급급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그 친구는 내 마음 아주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느덧 인생 중반으로 향해가는 지금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새로운 만남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은 거의 예외 없이 보류의 방으로 이동하고 있다. 반면 긍정의 방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인원이 늘기는커녕 야금야금 보류 또는 부정으로 넘어가고 있다. ‘모든 인간관계는 변한다.’는 불변의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나, 씁쓸하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순간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찰나의 기억이다. 그 기억은 우울한 어느 날 건네받은 자판기 커피 속에 있고, 밤새 몇 번을 썼다 지운 편지 속에도 있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밀려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도 다시 한번 누군가에게 성난 파도처럼 다가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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