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無題)

by 윤현섭

인간은 알 수 없는 것(미지)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이는 공포를 느끼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막차에서 내려 어두운 시골길을 걷는다고 상상해 보자.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대략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다행히 같이 내린 사람들이 있어서 별생각 없이 집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는 사라지고 혼자 걷는 소리만 남는다.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의 나뭇잎이 너무 무성해서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날도 흐려 달빛도 없다. 완벽한 어둠 속에 있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런 어둠은 마치 칼로 썰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질감이다. 농밀한 어둠 속에서는 눈이라는 기관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눈을 뜬 것과 감은 것의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감각이 차단되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듯이, 주위를 둘러싼 풀벌레 소리가 유독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가로수의 끝자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 무엇인가 숨죽이고 있다. 저쪽에서 숨죽이고 있는 존재가 자식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며 마중 나온 엄마인지 잔인한 살인마인지 아니면 떠돌이 개인지는 알 수 없다. 존재와 마주하기 전까지 시간은 슬로비디오처럼 더디게 흐른다. 짐짓 의연한 듯 노래를 흥얼거려 보지만, 팔뚝에 돋아난 닭살은 정반대의 얘기를 한다.

미지에 대한 공포는 종교의 탄생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비가 오지 않는 상황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화장실에서 사망한 원인이 심혈관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측신을 찾는 경우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하고 지금까지 원인을 몰랐던 현상들이 명확히 설명되면서 얼마나 많은 토속신앙이 사라졌을까? 오늘날까지 지구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종교가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기반을 둔 교리를 설파하는 게 과연 우연일까?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을 바라보는 인간은 답답하기 마련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난 어렸을 때부터 종교와 관련하여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매주 미사에 참석해 한주의 잘못을 참회하였으며, 주위의 권유로 몇 년 동안 복사도 했다. 처음 복사에 임명된 날 엄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간절히 원하셨던 것 같다. 난 절대자를 이해하고 연결되는 소망에 사로잡혀 열심히 종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기도문에 의문점이 생겼고, 그 의문점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 온 질문(신은 존재하는가?)과 만나게 되었다.

우선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죄를 저지르고, 그 죄를 참회하기 위해 종교적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개념부터 의문스러웠다. 죄(라는 개념)는 시대적 또는 사회적으로 달리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군주의 말 한마디에 사람의 목숨이 좌지우지될 수 있었고, 누구도 그 권위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가장 절대적인 가치인 생명을 박탈하는 권리를 신이 아닌 인간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어떤 합의를 보느냐에 따라 죄의 정의가 바뀔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거에 많은 사람을 죽였던 군주들은 본인들이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참회하기 위해 노력했을까? 권력자들은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낸 본인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했으며,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린 나에게는 성당에 나와 있는 모든 사람이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그밖에 인지하지 못한 채 지은 죄 역시 참회한다는 고백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본인에게 절대적인 믿음인 종교에 대해 의문을 품은 나를 호되게 혼내셨다. 내가 본인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삶을 살아서 아직 미천한 인지능력을 가졌고,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종교는 이미 많은 무신론자들의 반격을 견디며 살아남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또한 진정한 믿음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의문 없이 온전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종교와 관련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고, 요즘도 가끔 성직자들을 만나면 어릴 적 품은 의문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보통 그들은 나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다가도 깊게 들어가면 갈수록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다. (엄마 얼굴에서 보던 바로 그 표정) 마치 ‘그런 의문을 품는 건 매우 불손하다.’는 듯이. 한없이 진지한 것도 좋지만, 미지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한 사람을 구원한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접근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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