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othko

TATE BRITAIN

by 윤현섭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은 작년 8월이었습니다. 가기 싫었던 런던에 도착한 뒤 맞이한 첫 번째 토요일이었죠. 밀린 빨래를 하고 점심을 먹는데 문득 당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전날 저녁을 같이 먹은 친구가 여기까지 왔으니 테이트 브리튼은 꼭 가보라고 했거든요. 내셔널 갤러리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감상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특히 오필리아와 당신 작품에 대한 설명을 꽤 길게 늘어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와 밝히는 거지만, 그때 전 당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미술은 제 관심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입장료가 있었더라면 분명 저는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겁니다. 주말이라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미술관에 가는 게 좀 더 우아해 보인다고 생각해서 길을 나섰습니다.

숙소에서 테이트 브리튼까지는 꽤 먼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걷기 좋은 도시라는 런던의 명성을 믿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명불허전이라고 했나요? 런던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런던의 거리는 저를 끝없는 상상 속으로 이끌었죠. 혹시 Midnight in Paris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지금은 거장으로 기억되는 초보 예술가들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서머싯 몸의 소설에 등장하는 마차거리를 걸을 때는 정말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젊은 의대생 시절의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밤새워 얘기하고 싶습니다. 제 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상관 없습니다. 그런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을 제가 또 언제 만나보겠습니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한창 즐겁게 걷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역시 런던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더군요. 긴 우산을 팔에 건 신사의 나라 이미지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닌가 봅니다. 방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멀리 앞쪽에 보이는 테이트 브리튼을 향해 뛰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건물 앞에 “FREE FOR ALL”이라는 문구가 크게 걸려있더군요.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친구의 말처럼 미술관은 한산했습니다. 전 동선에 따라 천천히 감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제가 아는 그림은 하나도 없더군요. 그래도 전 자세히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관심 없다는 말로 그냥 지나가는 건 너무 건방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걷다 보니 아주 큰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큰 그림들이 띄엄띄엄 전시되어 있었지만, 그 방은 달랐습니다. 다양한 크기의 그림들이 사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중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림이 있더군요. 바로 오필리아였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남자가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전 아이들 뒤에 서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더군요. 실제 모델을 몇 시간씩 물속에 집어넣고 관찰한 작가의 집요함이 잘 느껴졌습니다.

고백하자면 사실 거기까지만 보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거든요. 슬슬 배도 고팠고요. 영국의 국민화가 JMW 터너의 방을 소개한 문구를 못 봤더라면, 저는 분명히 당신을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나 봅니다. 터너의 방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섰는데, 마침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게 되었죠. 보통의 그림보다 훨씬 큰 캔버스 위에 강렬한 색의 배경과 함께 제 눈에는 영락없이 사각형으로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이상한 끌림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간에 놓인 의자에 앉아 본격적으로 당신을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표현 속의 복잡한 심정’이라는 당신의 바람이 제 마음 어딘가를 살짝 건드렸습니다. 마치 당신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같이 그림을 보며 설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메말랐던 감정이 빠르게 차올랐고, 순식간에 제가 쌓아놓은 벽을 넘어 버렸습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습니다. 언제 눈물을 흘려봤는지 기억조차 없었지만, 그냥 두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저에게 솔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낯선 곳에서, 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당신을 감상하는 게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오히려 편안했습니다.

누군가 등을 두드리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서 있었습니다. 자원봉사자로 보였던 그녀는 한참 전에 마감 시간이 지났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몰입하고 있던 나머지, 저를 방해하지 않고 기다려 준 고마운 분이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두꺼운 안경 뒤의 푸른 눈으로 제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더니, 뉴욕에서 우연히 당신을 만난 일과 당신의 작품을 깊게 사랑하게 된 이유를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이 세상에 보낼 수 없는 편지만큼 쓸데없는 게 또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라도 당신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영감을 준 당신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작은 영감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Respectfully, HS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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