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몇 차원인가요?

lunch with Dr. Han

by 윤현섭

주중의 나는 습관에 따라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순서에 따라 준비하고 같은 커피를 마시며 같은 길로 출근한다. 습관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과업을 '추가적인' 노력 없이 수행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데 있다. 선발등판을 준비하는 야구선수가 매번 같은 방식(루틴)으로 몸을 푸는 것과 마찬가지다.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습관은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마치 몸에 꼭 맞는 스웨터처럼) 일단 무엇이라도 습관이 되면, 습관은 곧 숙달로 이어지고 숙달은 옵티멈(최적점)을 찾아낸다.

지금의 직장에서 하는 일도 10년 이상을 해 온 터라 이미 습관의 경지를 넘어 숙달과 매너리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직장에서 하는 가장 큰 고민은 '점심 뭐 먹지?'다. (아마 많은 직장인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코로나 전에는 혼밥을 해본 적이 없던 나도 지금은 혼자 햄버거 세트 정도는 자연스럽게 먹는다. 그날도 직장 근처의 M사 햄버거 가게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한참 맛있게 먹는데 누군가 내 앞자리에 털썩 앉는 게 보였다. 한박사였다. "혼자인 것 같은데 같이 먹어도 되지?" 이미 앉아놓고 질문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나는 태연하게 그러라고 했다. 사실 그때까지 한박사랑은 지나가다 마주치면 그냥 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였다. 나보다 입사가 좀 빠르고 미혼이며, 어릴 때 큰 병을 앓아 가발을 쓰고 다닌다는 정도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그는 두툼한 손으로 치즈버거를 꽉 눌러 납작하게 만든 다음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현섭씨는 취미가 뭐야?" 선배랍시고 반말로 질문하는 게 거슬렸지만, 나는 대충 답변하고 먹는 데 열중했다. "혹시 차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갑자기?’와 ‘seriously?’였다. (이과 망해라) '혹시 본인의 별명이 4차원인 걸 알고 날 시험하는 건가?' 감튀에 듬뿍 찍어 먹으려고 케첩을 세 개나 받아온 게 후회스러웠다. (카운터 가서 뭐 또 가져올 거 없나?)

그는 치즈버거를 또 한 입 크게 베어 물고는 얘기를 이어 나갔다. “선이 1차원, 면이 2차원, 공간이 3차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은 3차원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럼 이 공간에서 현섭씨가 인식하는 사물은 몇 차원일까? 3차원이라고? 아니지 아니지. 3차원에 있는 존재가 인식할 수 있는 차원은 2차원 또는 1차원이야. 예를 들어볼게. 내가 이렇게 등 뒤로 손을 숨기고 어떤 동작을 취한다고 해보자고. 앞에 앉은 현섭씨가 과연 알 수 있을까? 당연히 모르겠지 현섭씨한테 투시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등 뒤에 숨긴 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F를 상징하는 가운데 손가락이 쫙 펴져 있었다. (멕이는 건가?) “자! 나는 등 뒤에 감춘 손가락으로 1을 만들고 있었어. (굳이 가운데 손가락으로?) 하지만 3차원 존재인 현섭씨가 지금 있는 자리에선 당연히 내 등 뒤를 보는 건 불가능하고, 이는 현섭씨의 인지능력이 2차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원근감을 느끼는데 무슨 소리냐고? 잘 생각해 봐. 현섭씨가 여기서 바라보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고 해보자고. 종이가 2차원 면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똑같이 그릴 수 있고, 심지어는 원근감도 나타낼 수 있지? 원근감은 현섭씨의 명민한 두뇌가 잘 훈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실제로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2차원(면)이야.” 나는 슬슬 입맛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면 2차원 존재는 1차원으로 사물을 인지하고, 1차원 존재는 0차원(점)으로 사물을 인지한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그럼 우리를 뛰어넘는 4차원 존재는 어떨까? 그런 존재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만약 있다면 현섭씨의 인생 전체 모습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시간까지 초월한 유비쿼터스적 존재라는 말이지.” 여기까지 들었는데 마침 막내한테 전화가 왔다. 오천 원짜리 편의점 상품권을 보내달라고 징징거렸는데, 오히려 너무 고마웠다. 난 사무실에서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겼다며 한박사를 두고 먼저 일어났다. (아까운 내 감튀)

차원과 관련하여 많이 쓰이는 표현은 ‘차원이 다르다’와 ‘쟤 4차원이야’ 정도가 있다. 차원이 다르다는 표현은 보통 자신과 비교하여 월등하게 뛰어난 존재를 가리킬 때 쓰인다. (2차 방정식 근의 공식과 3차 방정식 근의 공식처럼) 한 단계만 차이가 나도 이해해야 할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래서 보통 우리는 감히 대적하기 힘든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차원이 다르다’는 말을 하게 된다. 반면 4차원이라는 표현은 약간의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뭔가 나와는 다른데 이해하기는 귀찮고, 굳이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적절하게 버무려진 표현이다. 이는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의 독창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지한 표현이 아닐까?

‘N차 존재는 N-1차 이하의 인지능력을 지닌다.’는 한박사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와는 다른 두뇌 구조를 가진 사람과의 대화도 충분히 의미 있고, 심지어 긍정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느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오늘 점심은 또 뭘 먹지? 그리고 오늘은 내가 먼저 한선배님께 같이 점심 먹자고 해볼까? (한선배님이 별명처럼 4차원이 아닌 건 명확하다. 그날 햄버거를 먹는 동안 살짝 옆으로 돌아간 가발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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