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그동안 생각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조금 두렵지만, 손의 힘을 빼고 생각을 놓아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가 어색한지 쭈뼛거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내 조금씩 걸음을 옮긴다. 단조로운 리듬에 맞춰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마치 두 살 무렵의 막내를 연상시킨다. 암흑 같았던 머릿속이 생각의 움직임에 맞춰 조금씩 밝아진다. 온통 검은색으로 덮여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빛을 비춰보니 다양한 색이 보인다.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또는 인간의 언어로 정의되지 않은 미지의 색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걸음을 멈춘 생각이 무언가를 집어 올린다. 가까이서 보니 노란 호박(琥珀)처럼 생겼다. 생각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고민하던 생각이 갑자기 호박을 바닥에 내려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파편이 튀기고, 날카로운 소리가 퍼진다. 난 그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본다. 그 안에 보존되어 있는 모기의 DNA라도 찾고 싶은 것일까?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보이는 걸까?
다음 날, 그다음 날도 생각은 여전히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표정을 힐끔 보니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멈출 생각은 없어 보인다. 착실하게 시간이 흐르고, 열흘째 되던 날 마침내 호박이 반쪽으로 쪼개졌다. 생각이 잔뜩 웅크린 채로 보고 있는 탓에 그게 무엇인지 등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궁금한 나는 조심스럽게 돌아가 맞은편에 섰다. 그리고 생각의 손짓에 따라 쪼그려 앉는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이 손에 쥐고 있는 건 마치 수도꼭지처럼 생긴 물건이다. 다만 지금까지 보아왔던 평범한 수도꼭지는 아니다. 생각은 한번 만져보지 않겠냐는 듯 그것을 나에게 내민다. 전체적으로 말랑말랑한데 처음 보는 재질이다. 내 눈에는 영락없이 투명한 수도꼭지로 보이지만, 정확한 용도는 알 수가 없다. 신기한 것을 보게 해 준 보답의 의미로, 난 수도꼭지 표면에 묻은 이물질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손으로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수도꼭지는 점점 더 투명해지고, 환하게 빛난다. 뿌듯한 마음으로 생각한테 되돌려 주는데, 그것 위에 어떤 숫자가 적혀있는 게 눈에 보인다. 2012. 뭐지? 생산연도인가?
의미 없는 날이 흐르고, 다시 생각이 있는 곳으로 가본다. 생각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긴다. 갑자기 미묘한 흥분감이 몸 여기저기를 내달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생각이 내뿜는 빛이 좀 더 밝아진 것 같다. 그리고 나를 향해 뛰어오는 모습에서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생각은 내 손을 잡고 어두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기분탓인가? 그동안 생각의 키가 많이 자란 것 같다. 익숙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혼자 가본 적이 있는 그곳은 너무 농밀한 어둠 탓에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마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그곳의 어둠은 단단한 칼로 잘라서 손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와 다른 점은 딱 한 가지, 밝은 빛을 내는 생각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듬직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의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다양한 자극을 통해 세상을 인지해 온 나로서는 매우 답답하다. 그래도 어디선가 들리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생각이 우뚝 멈춰 섰다. 생각이 고개를 들자 밝은 빛이 위로 뻗어 나가고, 바로 앞쪽에 거대한 장벽이 서 있는 게 보인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여러 개의 쭈글쭈글한 장벽이 나무 울타리처럼 나란히 엮여 있다. 그중 붉은색 장벽 앞에 선 생각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투명 수도꼭지다. 그러나 지난번 모습과는 다르게 한쪽 구멍에 긴 대나무가 꽂혀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대나무지만, 끝부분이 사선으로 날카롭게 절단되어 있다. 생각은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본 후, 천천히 수도꼭지 끝을 장벽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단호한 몸짓으로 날카로운 부분을 장벽에 박아 넣었다. 순간 엄청난 두통이 밀려온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이다.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괴로워하다 이내 기절해 버린다.
눈을 뜨니 생각이 나를 내려 보고 있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채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는다. 두통 때문에 기절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무의식이 두통을 모두 먹어버렸는지 말끔히 사라졌다. 오히려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살아있는 게 느껴진다. 주변에서 발생하는 아주 작은 소리,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모두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고개를 돌려보니 손짓으로 나를 부르는 생각이 보인다. 내가 다가가자 생각은 수도꼭지를 가리켰다. “어쩌라고? 틀어보라고?” 반시계방향으로 돌리는 시늉을 하는 생각을 보며 추측한다. 난 서서히 손을 뻗어 손잡이를 찾는다. 그러나 달려있어야 할 손잡이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납작하게 파인 홈이 보인다. 불현듯 안주머니에 꽂아둔 만년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만년필을 빼서 뚜껑을 연 후 날카로운 펜촉을 홈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돌린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엄청난 양의 액체가 흘러나온다. 액체는 순식간에 내 무릎까지 차올랐다. 물보다 점성이 진한 액체 속에는 물고기처럼 생긴 것들이 들어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탓에 손을 뻗어 잡아보려 하지만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본다. 겨우겨우 한 마리를 잡아서 배를 갈라보니,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이 가득 들어있다. 따뜻한 기억이 내 마음을 가득 밝히고, 서럽게 울던 어린 날의 모습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따뜻함과 차가움, 순수함과 추악함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 던져진 나는 방향을 잃은 채 한참을 방황한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어지러움 속에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제는 지난 날의 나에게 화해를 청하고 놓아달라 부탁하자. 영원히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