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일본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여류작가의 섬세한 감정표현이 돋보이는 소설 ‘빙점’이다. 이야기는 무라이와의 은밀한 시간을 기대하며 나쓰에가 밖으로 내몬 딸이 죽으면서 시작된다. 그 후 작가가 여기저기 뿌려놓은 단서에 따라 부인의 부정을 확신하게 된 게이조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복수를 다짐한다. 보통은 복수라고 하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방법을 떠올리지만, 게이조는 정반대의 방법을 택한다. 절망에 빠져있는 나쓰에가 딸을 죽인 범인의 아이를 맡아 기르도록 만든 것이다. 처음 친구에게 범인의 아이를 요청할 때, 게이조는 자식을 잃은 분노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원수의 자식을 거두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건 허울뿐인 말이었고, 실상은 죄 없는 아이를 이용하여 부인(나쓰에)에게 완벽하게 복수하는 장면을 꿈꿨다.
입양된 아이 요코는 구김살 없이 정직하고 밝은 아이로 성장한다. 그러나 게이조는 요코에게 어떠한 애정도 느끼지 못하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지 않는다. 요코의 친부를 모르는 나쓰에만이 죽은 딸에게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인다. 물론 요코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지만, 나쓰에가 요코를 챙기는 모습은 헌신적인 엄마의 전형이다. 맛있는 것을 챙겨주고 겨울을 대비하여 손수 스웨터를 뜨는 장면을 보면, 요코가 원래부터 나쓰에의 딸이라는 느낌을 준다.
어느 날 게이조의 서재를 청소하던 나쓰에는 남편이 쓴 쪽지를 발견한다. 몰래 읽은 쪽지를 통해서 게이조가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요코를 입양한 것이고, 목숨보다 소중한 요코가 실은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범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날 이후로 요코를 향한 나쓰에의 사랑은 차갑게 식어버린다. 이성을 잃은 채 자신의 목을 조르고, 졸업식 답사를 숨기는 엄마(나쓰에)의 행동을 보며 요코는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본인은 엄마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요코를 향한 나쓰에의 마음이 돌아서는 순간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다만 엄마에게 느끼는 애틋한 감정을 송두리째 빼앗긴 요코를 상상하면 너무 가엽다. 마치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빙하 위에 놓인 여우처럼 어떤 희망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요코를 친동생처럼 아끼는 오빠 도루는 요코에게 룸메이트(기다하라)를 소개한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요코는 결국 기다하라를 사랑하게 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나쓰에는 요코의 비밀을 폭로한다. 폭로의 동기는 분노가 아니라 질투심이었다. 딸을 질투하는 엄마는 현실에서도 꽤 많이 볼 수 있다. 보통은 모성애가 질투심을 압도하고 결국 엄마는 딸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배를 아파 난 딸도 아니고 심지어 살인자의 자식인 요코에게 보여줄 모성애 따위는 나쓰에에게 없었다. 기다하라는 나쓰에에게 증거를 요구하며 요코가 살인자의 자식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더 나아가 설사 요코가 살인자의 자식이 맞더라도 자신의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 선언한다. 하지만 나쓰에의 폭로를 들은 요코의 마음은 그대로 얼어버린다.
" 저의 마음은 얼어붙었습니다. 얼어버린 것입니다. 저의 빙점(氷點)은 '너는 죄인의 자식'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자신은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임을 자부하며 살아온 요코에게 나쓰에의 폭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얼마 후 요코는 세 통의 유서를 남긴 채, 루리코(나쓰에의 친딸)가 살해된 강변에서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아직 빙점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너무 친절한 스포일러가 되었다. 요코가 음독을 시도한 후의 내용은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중적이고, 특히 불순한 의도는 선량한 명분 뒤에 놓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을 종교적 박애로 감춘 게이조, 불륜에 대한 수치심을 모성애로 감춘 나쓰에, 이성에 대한 사랑을 형제애로 감춘 도루를 보면 인간이 생각하는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너무 어려워 보인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고백을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건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보통 빙점이라는 단어를 보면 물이 얼기 시작하는 온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온도 역시 빙점이다. 오늘 당신이 하는 갖가지 말은 누군가의 마음을 얼리거나 또는 녹일 수 있다. 어느 쪽을 택할지는 본인의 자유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 또한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