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작품 해석하기

이성과 감성

by 윤현섭

이 책을 사게 된 계기가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떨이 문구를 보고 들어간 서점에서 제인 오스틴과 민음사라는 두 단어만 보고 집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 난 겉멋이 잔뜩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제인 오스틴의 이름을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어서 싼 가격에 집안 인테리어용으로는 그만이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도 이 책은 꽤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고,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에 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마음속으로 흐뭇했던걸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아무튼 몇 년 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너무 많은 수사로 인한 긴 문장과 고어의 나열이 끝없이 이어지는 통에 몇 페이지를 읽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격리 기간 동안 읽을 책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조심스럽게(?) 읽어 나갔다.

그동안 겉멋이 좀 빠지고 인지 능력이 다소 향상된 덕일지 모르겠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책은 술술 읽혔다. 너무 많은 수사라고 치부해 버렸던 부분은 세밀한 풍경의 묘사였거나, 얼핏 보아 넘어가면 모르지만 자세히 곱씹어보면 작가의 영민한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책에 묘사된 문장을 놓치지 않고 끈기 있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눈앞에 과거 잉글랜드의 시골 풍경이 보였고 작가의 위트로 인한 웃음이 픽픽 새어 나왔다. (마치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처럼)

작가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을 소재로 이성과 감성에 가장 부합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고, 그 캐릭터들의 극명한 대조를 통하여 본인의 생각을 암시한다. 우선 앨리너는 대시우드 집안의 장녀로서 이성을 상징한다. 그녀는 어떤 순간에도 예의를 갖추고자 노력하며 사회에서 정해놓은 관례를 좀처럼 어기지 않는다. 반면 감성을 대표하는 차녀 메리앤은 감정을 제한하는 것은 죄악이라 여기며, 어떠한 순간(타인이 불행한 순간)에도 자신의 기분에 따라 행동하고 말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보면 마치 작가가 이성을 붙잡고 사는 게 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작가는 양립하기 힘든 가치를 둘 다 손에 쥐고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편을 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마치 아이 둘을 키우는 부모가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혼내 듯) 이런 작가의 생각은 문장 곳곳에 숨어 있고, 보통 한 번 비꼬아져 있어서 자세히 읽지 않는 이상 파악하기가 힘들다. 초반에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낭만적인 이야기(메리앤과 윌러비의 관계)를 하고 있으며, 중반에는 감성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파국으로 치닫으며 긴장이 고조된다. 마치 이성을 지키면 본전 역시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여류작가답게 이성과 감성 모두에게 해피엔딩을 선사하는 아량을 베푼다. 500쪽짜리 이야기가 몇 줄로 요약되는 게 좀 성의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이 철학적 질문을 주된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취침 전 좋은 꿈을 꾸기 위한 여흥을 제공하는데 집중했다고 가정하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이성과 감성 어느 한쪽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적절하게 버무리면서 살아간다. 상대적으로 젊은 시절에는 선과 악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이고 거기에 따라 감성적인 의사결정 역시 쉽게 할 수 있다. 마치 본인이 진실의 수호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왕왕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선과 악의 경계가 다소 모호해지고 심지어 자주 뒤바뀌는 경우가 반복되면 이성적인 처신이 항상 손해를 덜 보는 길이라 여겨진다. 보통의 경우 나이가 들면서 가진 게 많아지게 되고 지킬게 늘어난다고 가정하면 감성을 줄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늘리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나이가 들어서까지 감성이 많이 앞서는 경우는 극단 값에 위치한 사람이거나 상대적으로 잃을 게 별로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성적 또는 감성적 행동은 결국 본인의 상황에 따라 발현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비난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 또는 감성적 행동에 대한 대가를 본인이 누리는 것처럼 불이익도 결국 본인이 감수해야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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