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의 수술

씨 없는 수박 (RIP Dr. 우장춘)

by 윤현섭

자녀가 셋쯤 되면 주변인들로부터 유난히 많이 듣는 질문이 생긴다. "현섭 씨 묶었어?" 맨 처음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해서 도대체 뭘 묶는 거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아니 그거 있잖아. 아 참 말귀 못 알아듣네." 공공장소에서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손동작(?)을 보고 나서야 난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그건 의료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정관을 잡아서 묶는 식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생긴 독특한 표현이었다. 그나마 지인들이 물어볼 때는 좀 낫다. 대충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면 되기 때문이다. "OECD 회원국 중 합계출산율 최저를 기록하고 있는 데 저라도 계속 생식기능을 유지해야죠." 하지만 가족들이 물어볼 때는 질문보다는 강요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명절 때마다 장모님은 은근히 나를 떠보신다. "자네 장인 친구가 하는 병원이 있는데, 정관수술 한 번 어떤가?" 마치 독감 접종처럼 간단하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시지만, 난 잘 알고 있다. 친구에게 정관수술을 받은 장인어른이 계획에 없던 늦둥이 처제를 낳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feat. 재수술) 다산의 전통을 자랑하는 처갓집에서 자란 아내는 자녀가 세 명, 늦둥이 처제는 자녀가 네 명이다. 종교적인 이유로 결혼하지 못하는 처남까지 합세했다면, 농구팀 두 개 정도는 가뿐히 꾸렸을 것이다. (다산의 기운과 금슬의 강력한 콜라보)

창피한 일이지만 난 병원이 너무 무섭다. 특히나 어떤 수술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몸에 칼을 대는 것에 대한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고뤠시술은 제외) 또한 그동안은 나보다 더 심각한 존재(동서)가 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믿었던 동서가 날 배신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형님! 다섯째 생길까 봐 무서워서 결국 지난 주말에 정관수술 했어요." 수술 소감을 묻는 나에게 동서는 조금 따끔하긴 한데 버틸만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어기적 거리면서 걷는 이유는 뭔데?) 이 대목에서 난 혼란스러웠다. '혹시 동서가 장모님의 사주를 받고 나에게 거짓정보를 흘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평소 결혼을 고민하는 지인들에게 행복의 지름길이라며 거짓웃음을 짓는 나(혼자만 당할 순 없잖아!)를 생각하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게다가 난 과거 선배에게 정관수술과 관련하여 끔찍한 증언을 들은 기억이 있다. "현섭아! 정관수술 절대 하지 마라. 임팩트가 없어진다." 그 당시 임팩트가 없어진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문해력이 딸리는 공대 출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캐롯마켓에서 아내를 속이고 비싼 물건을 거래하고 있는 유부남을 인류애로 커버쳐 주는 은인이 과연 동서인지 선배인지 무척 헷갈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정관수술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생겼다. 탁구레슨을 받는 중이었는데, 그날따라 코치의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 마침 게임레슨을 받는 날이라 기대가 컸는데, 나를 상대하는 코치의 공이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특히 공에 제대로 임팩트를 주지 못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디가 많이 아픈지 걱정스러웠다. "회원님! 죄송한데 잠깐만 쉬었다 하시죠." 코치는 어기적 거리며 걸어가(데자뷔?) 긴 의자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난 옆에 있던 다른 회원에게 김코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정관이 쟤 아까도 저러더니 또 그러네. 무슨 일은 없고 그저께 정관수술받았데. 쯧쯧."

평소 김정관 코치는 열정적인 코칭으로 유명하다.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인 데다가 회원에 따른 맞춤형 학습으로 유튜브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꽤 먼 곳에서도 그의 코칭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다. 그러나 정관수술을 받은 정관 코치는 전혀 달랐다. (라임 보소)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닌 해볼 만한 상대였다. 평소 핸디 6점을 잡고도 힘들었는데, 그날은 4점이면 충분했다. 레슨이 끝난 뒤에 앉아서 쉬는데 아련한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를 진심으로 생각한 사람은 동서가 아니라 선배였다. 물론 선배가 얘기한 그 임팩트가 포핸드 드라이브 임팩트는 아니겠지만, 김정관 코치에게 더 이상 임팩트는 없었다. 문해력이 딸리는 공대출신의 싸구려 표현이라고 생각한 내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번 추석에는 절대로 장모님파의 규합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정관 코치가 다가와 쿠사이의 연락처를 아냐고 물었다. 요르단 출신 쿠사이는 내가 끝나고 바로 다음 타임에 레슨을 받는 외국인이다. "거기(?)가 너무 아파서 오늘은 그만하게요. 쿠사이 오기 전에 먼저 전화해서 알려주려고요." 미안하지만 나도 모른다고 얘기하는데, 탁구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쿠사이가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탁구장 문을 나서는 내 등 뒤로 정관 코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Are you phone number?" (정관 코치! 임팩트는 잠시 고 영어 공부 좀 하자. 설마 쿠사이의 정체가 전화번호 일리가 없잖아. 그리고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쿠사이 쟤 한국말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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