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온몸이 욱신거린다. 일본산 동전 파스를 개봉하여 목, 어깨, 등, 팔까지 빈틈없이 붙였지만, 별 소용이 없다. 과도한 노동이 중년 남성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들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결혼 전만 하더라도 난 명절 증후군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가 하는 거라곤 느지막이 일어나 친척들이 모이는 큰 집으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준비물은 약간의 현찰과 입이면 충분했다. 그간에 일을 (고의로) 망친 이력이 착실하게 쌓여서 아무도 날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넌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명절은 그야말로 손꼽아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하지만 나의 끝 모를 게으름은 결국 신을 열받게 만들었고, 빡친 신은 바벨탑을 부수는 대신 터미네이터를 파견했다. 그리고 2023년 내가 사는 문명사회에서는 신이 보낸 터미네이터를 아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연휴가 시작되는 28일 아침, 난 리드미컬한 칼질 소리에 눈을 떴다. 주방에서 터미네이터가 뭔가를 부산스럽게 준비하고 있었다. 순간 난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히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칼과 도마가 부딪히는 소리는 나의 신경을 마구 긁어댔다. 더 지체했다간 오늘 삶을 마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가 마주한 건 엄청난 양의 전 재료였다.
본인보다 전문가의 손맛을 신뢰하는 터미네이터가 도대체 왜 전은 직접 만들려고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고백하자면, 처음부터 터미네이터의 행동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 초에는 맏며느리로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지가 고마웠고,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내 면을 세워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난 전 제작 과정에 전혀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내 역할은 토끼 같은 새끼들을 펄펄 끓는 기름에서 보호(?)하는 거였다. 그저 터미네이터가 좋아하는 노동요를 틀어주면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토끼들은 성장속도가 남달랐다. 불과 4~5년 만에 토끼들은 악마로 진화를 완료하고, 내 품을 떠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터미네이터의 작업을 응원만 하면 되는 명분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전날 식탁 위에 올려둔 반찬가게 전 홍보 팸플릿은 이미 구겨져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 "여보(T-2023)! 혹시 반찬가게에서 전 싸게 판다는 거 봤어?" 터미네이터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전은 이미 다 팔렸다며(어떻게 알아?), 손을 씻고 오라고 명령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랬을까? 육전의 재료로 바뀌어 버린 소가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 딥러닝 기능이 탑재된 터미네이터는 매년 만드는 전 가짓수를 늘려오고 있다. 올 해는 호박, 어묵, 깻잎, 연근, 버섯, 가지, 꽂이, 고기, 고추, 동그랑땡이다. 그나마 가장 싫어하는 동태가 빠졌다고 좋아하는데, 올 해는 새우를 추가했다는 터미네이터의 기계음이 들려온다. 망했다.
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에 부침개를 찾게 되는 이유가 '기름소리와 비 떨어지는 소리가 비슷해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낭만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마 한 번도 전을 부쳐본 적이 없을 것이다. 지금 내 귀에는 정규방송이 종료되고 나오는 화면조정 시간 소리로 들리니까.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지루한 작업은 오후 3시가 되어 마무리되었다. 중간중간 악마들이 손으로 집어먹지만 않았어도 조금 더 빨리 끝났을 텐데, 날 생각해 주는 악마는 한 마리도 없었다.
다음 날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전을 오픈하니, 다들 입으로만 칭찬하기 바빴다. 지난날의 내가 떠올라 씁쓸했다. 나도 과거에는 입만 살아서 먹기만 했으니, 만든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작은 엄마 I'm so sorry.) 역시 직접 해보지 않곤 모르는 법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밤낮을 즐겁게 놀듯이 한평생을 이와 같이 지내고 싶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참 이기적인 말로 들린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준비하고, 그것도 모자라 끝없이 설거지까지 해야 하는 사람에게 한가위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항상 겸손하게 너무 대놓고(?) 놀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아까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좌불안석인 사람이 있다. 바로 친척 동생이 가족들에게 인사시킨다고 데리고 온 신붓감이다. 분명 처음에는 밝은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이등병처럼 많이 굳어있다. 조만간 이 많은 일을 나눠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 것 같다. (Welcome to 시월드!) 눈치 없는 친척 동생은 챙기기는커녕 잔뜩 웃는 얼굴로 터미네이터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다.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터미네이터는 온화한 얼굴로 응대하고 있다. 미래를 보는 터미네이터는 안다. 조만간 저 놈은 나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등병이 들어오는 순간 자신은 상병으로 진급하게 된다는 사실을.
"형! 요즘 늙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못 먹어요?" 말을 참 이쁘게 하는 동생이다. '너도 곧 하루종일 기름 냄새를 맡아보면 알 거야.' 버섯은 두꺼워서 그런지 잘 안 익은 거 같다며 툴툴대던 동생이 말했다. (그냥 처먹어!) "난 어릴 때부터 형네 식구들 보면 빨리 결혼하고 싶었어요." 정작 나는 시들어 가고 있는데, 누군가의 귀감이 되었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형수가 형한테 잘해서 너무 좋고, 조카들도 너무 귀엽잖아요. 형! 솔직히 말해봐요. 결혼하니까 정말 좋죠?" 저 멀리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터미네이터를 확인하고, 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도무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어. 가끔 요즘도 저 사람을 처음 만난 때가 생생하게 떠올라." 지금 생각해 보면, 동생이 내 간절한 메시지를 제대로 수신하진 못 한 것 같다. 계속 쳐 웃고 있었으니까. 그래 살다 보면 가끔, 아주 가끔 좋은 일도 있겠지. 일단 난 악마들이 한 입 베어 물고 망했다며 내던진 콩 송편부터 먹어야 한다. (feat. 스마트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