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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Oct 07. 2023

잡상인 선생님

상쾌한 진실

 요즘은 지하철을 이용할 일이 거의 없지만, 한 때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평균 수면 시간이 다섯 시간도 채 되지 않는,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그 짓을 7년이나 참 열심히도 한 것 같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듯이, 몇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고른 회사는 겨우(?) XX였다. 여기서 시원하게 사명을 밝히고 싶지만 먹던 우물에 침을 뱉는 고, 무엇보다 아직도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옛 동료들이 남아 있어서 참겠다.

 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아들이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들어갔으니 부모님은 무척 뿌듯해하셨다. 하지만 실상은 부모님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간절히 원했던 대학에 들어간 이후 목표가 없어져 버린 나는 급격하게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무엇보다 빨리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도피하듯 들어간 회사는 내 생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TV에서 그렇게 유연하고 참신한 조직이라며 수없이 광고를 때린 회사는 거기에 없었다. 면접 때는 분명 신입사원의 통통 튀는 생각이 필요하다면서 실실 쪼갰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까라면 까는 분위기였다. 수많은 부서 중에서 하필 경영관리팀에 배치된 나는 오랜 기간 막내로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회사 시절은 군대와 비슷할 정도로 불쾌한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입사 후 6년 정도가 흐른 어느 출근길이었다. 신입사원 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애사심이 넘쳐흘렀지만, 그건 몇 개월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매일 이어지는 강도 높은 업무에 지쳐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그저 자리를 찾는 게 소원이었고, 앉자마자 잠들어 도착역을 지나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날도 지하철 플랫폼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낙담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출입문 바로 옆의 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무너지듯 자리에 앉은 나는 바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출입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반수면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신도림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후 가래가 잔뜩 낀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위대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출근하시는 모습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여러분과 같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는 번듯한 사업채를 운영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잡다구레한 물건을 팔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부끄러운 처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저를 조금씩만 도와주신다면 다행스럽게도 오늘 점심은 거르지 않을 수 있으며, 어쩌면 저녁에는 제일 좋아하는 순대국밥 한 그릇을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제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요즘같이 분쟁이 발발하는 시대에 꼭 필요한 볼펜형 녹음기입니다. 말 그대로 볼펜처럼 생긴 녹음기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제 손바닥에 쓱쓱 써지는 게 보이시죠? 물론 여러분들이 쓰는 휴대폰에는 통화 중 녹음 기능이나 일반 녹음 기능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휴대폰을 꺼내어 녹음한다고 하는 순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말을 가리기 시작할 것이며, 진실은 테이블 밑으로 숨어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쾌한 진실을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왜 상쾌한 진실이냐고요? 그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똑같이 여러분을 기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평소 거추장스럽게 신경 쓰이던 양심이라는 놈의 기분도 상쾌하게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자 단돈 만원이면, 간단하게 진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진실과 만원? 아 싸다 싸!"


 평소 같았으면 그냥 간단히 무시해 버리고 말았을 텐데, 볼펜형 녹음기라는 말이 내 관심을 끌었다. 얼마 전 중요한 회의록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회의 시작 전 테이블 위에 녹음기를 올려놨다가 백부장한테 핀잔을 들었기 때문이다. "윤현섭님! 그런 걸 뭐 하러 꺼내? 아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지금 사안이 얼마나 부서 간의 갈등을 유발하는지. 그런데 대놓고 녹음 중이니까 너네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보이면 쟤네들이 입을 열겠냐고. 생각 좀 하고 행동해. 응? 회의록 쓰기 위해서라고? 회의록은 그냥 수첩에 핵심 단어만 적어두고 나중에 작성해도 상관없잖아. 여기가 무슨 형사재판하는 법원도 아니고. 왜 그렇게 사람이 융통성이 없어?"


 연설을 마친 잡상인은 앉은 사람들의 무릎 위에 차례대로 물건을 올려놓았다. 신도림역에 정차할 때만 해도 절반 정도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한 사람만 빼고 모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은 어린애의 엄마였는데, 무릎에 앉은 아들이 자꾸 말을 거는 바람에 자는 척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잡상인이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내 무릎 위에도 볼펜이 올려져 있었다. 볼펜 모양은 아무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 중소기업 창립 문구가 새겨진 기념품처럼 생겼고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옆부분에는 조악한 품질에 어울리지 않게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볼펜 클립이 끼워져 있었다. 얼마 후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잡상인은 신속하게 물건을 수거해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난 정장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뽑았다. "제가 하나 사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쓰는 거죠?" 방금 전까지 10번 칸은 꽝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잡상인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순간 충치로 문들어진 니가 보였고,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입냄새가 풍겨왔다. "아 손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 제품은 작동법도 너무 단순하고 쉽습니다. 여기 황금색 볼펜 클립이 보이시죠? 이걸 그냥 밑으로 내리기만 하면 녹음이 시작되고, 다시 올리면 녹음이 끝나게 됩니다. 클립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볼펜심도 올라가고 내려가기 때문에 감쪽같지요. 녹음이 끝난 후에는 녹음기 옆에 숨겨진 단자를 통해 파일을 PC로 전송해서 들으시면 됩니다. 만원에 이 정도 품질의 물건은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헤헤"

 자세히 살펴보니 잡상인의 말대로 볼펜 클립은 위아래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고, 몸통에는 열고 닫을 수 있는 숨겨진 단자가 보였다. 영락없이 평범한 볼펜으로 보였고, 필기도 가능했다. 그 순간 잡상인이 열변을 토한 것처럼 '속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무턱대고 남을 의심하는 건 부정 타기에 딱 알맞은 행동이었다. 난 손에 쥐고 있던 만원을 잡상인에게 건넸다. 을 받아 든 그는 방금 전 구매계약을 체결한 자동차 세일즈맨의 얼굴에서나 볼법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손님! 이 제품은 AAA형 건전지가 두 개 들어가는데 함께 구매하시죠. 한 개 천 원에 모시겠습니다." 이미 전기차를 산 사람에게 배터리를 따로 구입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회사 공용 비품실에서 건전지쯤은 쉽게 구할 수 있고, 만원이면 잡상인의 점심도 충분히 해결되었다 싶어서 그 제안은 정중히 거절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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