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현섭 Oct 08. 2023

잡상인 선생님 2

상쾌한 진실

 "윤현섭 님!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오늘 2시부터 승진심사가 진행되네. 자네도 이번에 과장 승진 대상자니까 기대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우리 팀에 승진 대상자가 많아서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네." 나도 사람인지라 승진심사는 당연히 신경 쓰였다. 하지만 지금은 백부장의 입 가장자리에 묻은 흰 침거품이 눈에 더 거슬렸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백부장은 엄지와 검지로 능숙하게 거품을 걷어내 의자에 쓱 문지르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난주에 자네 사정을 경영지원실장님께 직접 말씀드렸네. 실장님이 해외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워낙 젊은 분이어서 직원 인사에 큰 관심이 없는 게 사실이잖나. 자네가 누구보다 성실하다고 생각하시지만, 눈에 띄는 성과가 있냐고 반문하시더군." 실장이 유학을 다녀온 젊은이라는 사실과 직원 인사에 관심을 갖는 것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그저 실장은 회장의 큰사위고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공감하기 힘든 게 아닐까?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놔두고 엉뚱한 걸로 열심히 충성심을 발휘하는 백부장이 참 짠해 보였다. (feat. 미래의 내 모습)

 백부장의 말을 들으며, 그동안 우리 부서에서 승진한 사람 중에 명백한 실적이 있었던 사람이 누구였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딱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실적이 명확하게(?) 나타나는 영업부서와는 달리 경영관리팀에서 하는 업무는 각 사업부문의 실적을 집계 및 관리하고, 대표이사의 지시를 수행하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핵심부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대표이사는 회장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하는 뻐꾸기였고,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허드렛일을 무한 반복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인사팀에서도 알고 있으니까 연말에 지급하는 인센티브도 모든 사업 부문의 평균으로 받는 게 아닌가? 우리가 잘한 것을 수치화할 수 없고, 못한 것을 질책할 수도 없다는 의미에서 볼 때, 그냥 딱 중간만큼 받는 건 합리적으로 보였다.

 백부장이 실장에게 말한 나의 사정은 승진 소요연한에서 3개월이 모자란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나의 사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 탓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사람 잡겠다 싶어서 올 초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회사에서는 휴직 3개월을 선물(?)로 주었다. 몇 년간 체력이 바닥까지 소진된 나에게 휴직기간은 군대에서 백일휴가를 나온 것처럼 달콤했다. 하지만 3개월은 빠르게 흘러갔고, 인사팀에서는 휴직 중인 관심사병을 주기적으로 챙겼다. 마치 내 복귀가 그들의 고과와 관련되어 있다는 듯이. 휴직 막판에 연봉조정 얘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난 분명히 탈영병이 되었을 것이다.

 "실장님은 누구보다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이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현섭 님이 꼭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 (또 사표 낼까 봐?) 물론 우리 팀 수진님도 과장 승진 대상자이긴 하지만 경력직이고, 대졸신입 XX기인 자네와는 엄연히 다르지. 최근에 육아휴직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인사팀에서 반대하는 모양이더군.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네. 우주의 기운이 자네에게 몰리고 있어. 아무튼 이번에 승진하면 내가 애쓴 건 잊지 말게나."


(다음 날)


 "손님! 손님! 일어나세요! 종착역이에요! 내리셔야죠!" 역무원이 외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비몽사몽 눈을 떴는데, 앞에는 생각지도 못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어제 만났던 잡상인이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출입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핑 도는 느낌이 올라와 바로 앞에 있는 벤치에 털썩 걸터앉았다. 무릎 터진 솜바지, 반들반들한 롱패딩, 올 풀린 스웨터, 색을 알 수 없는 티셔츠까지 내 앞에 있는 잡상인은 어제와 똑같은 복장이었다. 다만 듬성듬성 빠져가는 머리는 어제보다 좀 더 기름졌고, 여기저기 묻어있는 비듬이 보였다. 난 우선 깨워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까 대방역쯤에서 안 팔린 물건을 회수하다가 우연히 손님을 봤습니다. 오늘도 역시 공치나 보다 생각하면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죠. 그런데 종착역인 용산까지 왔는데도 손님이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계속 보고 있었습니다. 안내 방송을 못 들으실 것 같았기 때문이죠. 어제 손님이 사주신 볼펜 덕분에 밥을 굶지 않았으니 신세를 갚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님이 반드시 알 필요는 없으시지만, 어제는 딱 한 개만 팔렸거든요. 헤헤. 아무튼 이렇게 잘 내리셨으니 됐죠 뭐. 근데 어제 구입하신 볼펜은 좀 써보셨나요? 가격 대비 성능이 괜찮지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물어보는 모습이 마치 얼마 전 출시한 신제품의 반응을 모니터링하는 마케터처럼 보였다. '근데 내가 볼펜을 어디 두었더라?' 어제 출근해서 책상 위에 둔 것 같긴 한데, 그 후에 워낙 정신없이 일한 탓에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직 사용해 보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사실 어제 특별히 건전지가 들어간 놈으로 골라 드렸습니다." 나를 배려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지만, 건전지로 폭리를 취하려 한 사실이 떠올라 별로 고맙진 않았다.

 "손님이 깜빡 잊고 건전지를 넣지 않았더라도 바로 사용하실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언젠가 그 볼펜이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겁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점점 각박 해지는 게 명백하고 경쟁은 또 얼마나 치열합니까? 고도 성장기에는 나눠 먹을 수 있는 파이가 점점 커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너도 나도 행복하고 너그러웠죠. 제가 그 시절에 사업을 해봐서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성장은 둔화되어 거의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고 웬만한 단순노동은 이미 다 로봇으로 대체되었지요. 또한 과거에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진 많은 일조차 AI로 대체되고 있단 말입니다. 결국 일자리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줄어든 일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피 터지게 싸우게 되었지요. 한정된 파이를 나눠 먹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적게 먹어야 내가 더 먹을 수 있는 상황으로 변한 겁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고. 나만 아니면 된다며 외치는 어떤 연예인을 보며 우리가 웃는다는 건 그만큼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서민들의 앵겔지수는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까지 높아지고, 젊은이들은 몸 누일 방 한 칸 마련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입니다. 환경파괴는 또 어떻습니까? 인류가 매일 쏟아내는 오염물질과 열기에 기온은 상승하고, 빙하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콜라 광고에서나 북극곰을 볼 수 있겠죠. 이 한심한 북극곰 킬러들! 제가 20여 년 전 신혼여행을 갔던 어느 휴양지도 금방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거구요. 하지만 지구 어디엔가 우리는 기후변화의 위협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바보들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전 세계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있고, 후진국의 몰락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선진국의 동반 몰락입니다. 선진국에서 마치 선심 쓰듯이 후진국으로 떠넘겨버린 공해 산업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순망치한의 이치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타인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언젠가 손님이 상쾌한 진실을 마주하시더라도 너무 노여워하거나 좌절하지 마세요. 그저 짧게 아파하고, 툭툭 털며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믿는 놈들은 답 없는 낙천주의자거나, 이미 누군가에게 크게 데어서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킨 경우겠지요. 헤헤."

 평범한 잡상인에게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혼자 열차 안에 갇혀 지각할 뻔한 걸 면하게 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에 멍하니 듣고 있었다. "손님! 이 제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손님처럼 매일 많이 걷는 직장인들을 위한 쿠션 깔창인데요. 원래 한 개에 3천 원인데, 손님께는 특별히 2개 5천 원에 모시겠습니다. 또한 이 제품은.." 갑자기 머릿속에 백부장의 기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상상속 백부장은 오늘 오전 실장에게 보고하기로 되어 있는 미완성 보고서를 찾고 있었다. 난 잡상인 선생님에게 지갑을 두고 와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급하게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두칸 세칸씩 마구 뛰어넘는 내 뒤로 걸걸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편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잡상인 선생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