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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Oct 09. 2023

잡상인 선생님 3

상쾌한 진실

 용산역에서 회사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달렸다. 허겁지겁 사무실로 들어와 앉자마자 백부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윤현섭 님! 브라질 공장 증설 검토자료 빨리 가져와. 실장님께 보고 드리기 전에 먼저 좀 봐야 할 거 아냐!" 어차피 보고해 봐야 사이시옷 같은 맞춤법이나 지적할 거면서 백부장은 더럽게 보챘다. 실장 보고는 금방 끝낼 수밖에 없었다. 대표이사가 보고시간을 1시간이나 앞당기는 바람에 더 지체했다가는 늦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이널 보스를 만나기 위해 회의실로 향했다.

 거의 장편소설 분량의 회의자료를 참석자 수대로 세팅하고 있는데, 부사장님이 들어왔다. 부사장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준비한 자료를 슥슥 넘겨보더니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저기 경영관리팀장! 요즘 회사 실적도 별로 안 좋고, 때가 어느 때인데 이렇게 많은 회의자료를 출력해서 비치하나? 비상경영 몰라? 비상경영! 대기업에서 A4용지랑 토너 아껴서 뭐 하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 몰라요? 내가 평소에 작은 거부터 바꿔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어요? 작은 변화가 모여 결국은 큰 변화를 만드는 거야. 앞으로 회의자료는 여기 설치된 태블릿으로 준비하세요." 부사장님아침에 사모님한테 심한 닦임을 당했는지 상당히 날카로웠다. 하지만 회장사위(경영지원실장)를 갈굴 수는 없으니, 괜한 백부장을 타깃으로 삼았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사실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출력자료보다는 회의실 태블릿을 활용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난 회의 때 대표님께서 본인은 옛날 사람이라 컴퓨터로 보는 건 싫고 항상 종이로 출력된 자료를 두라고 하셔서.." 백부장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고, 그걸 들은 부사장은 잽싸게 태세를 전환했다. "대표님께서 그러셨다고? 큼큼! 그렇다면 출력자료를 활용하는 게 맞겠지. 대표님께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시는데 최대한 불편함이 없도록 보좌하는 게 우리 임무잖나."

 '역시 달라! 저렇게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고위 임원이 될 수 있구나!'라며 감탄하고 있는데, 대표님이 몇 가닥 남지 않은 앞머리가 휘날리지 않게 천천히 회의실로 걸어 들어왔다. 아침에 뭘 그렇게 먹었는지 불뚝 나온 배 밑으로 바지 후크는 풀려있었고, 그 위로 벨트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 "내가 회의시간을 앞당겨 놓고 이렇게 늦어서 미안합니다. 회장님이 저를 급하게 찾으시기도 했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최근에 수술을 받아서 신속하게 이동하기가 좀 힘듭니다. 치질 방석 어딨어! 내가 몇 번을 말해. 몇 번을! 회사 경영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겠어? 다음부턴 잘 좀 챙기세요!"  

 똥꼬가 아프다며 투정 부리는 대표님을 보면서 '시작부터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대표이사 보고는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최근 알 수 없는 이유로 회사 주가가 많이 올라(비상경영이라며?) 다들 두둑하게 챙겨서 그런지 뭔가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난 보고서에 있는 숫자 하나하나에 대한 근거를 모두 숙지하고 들어갔는데, 너무 쉽게 끝나서 그런지 허탈했다. 쓰는 사람은 주말까지 반납하며 한 달을 고민한 작품인데, 역시 읽기만 하는 들에게는 수많은 보고자료 중 하나일 뿐이었다.

 대표이사 보고 후 19층 사무실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경영지원실장과 둘만 남게 되었다. "윤현섭 님! 보고자료 준비하느라 고생했어요. 곧 브라질 출장도 가야 하니까 끝까지 잘 마무리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유학 끝나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랐는데, 현섭 님이 내 후배더라고. 어제 승진심사위원회 들어가서 봤는데, 나도 학부는 현섭 님이랑 같아요. 95학번. 응원단장이었다고 말하면 안 믿을 거지? 아참! 조금 있으면 승진자 발표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실장님이 전달해 준 은밀한 정보를 듣고 난 기분이 좋아졌다. 휴직 기간 3개월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실장님의 말대로, 퇴근 무렵 발표한 승진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야 말로 임원으로 승진할 것 같았던 백부장님이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다. 임원 포스트로 올라오면서 많이 기대하셨을 텐데, 2년 연속 누락되었으니 앞으로도 큰 가망성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어른답게 백부장님은 나를 많이 축하해 주셨다. "윤현섭 님 아니 윤과장님 축하해. 내가 윤과장 올리느라고 애 많이 썼어. 앞으로 절대 나 잊으면 안 된다. 알았지? 그리고 오늘은 윤과장 덕에 한우 좀 먹어보자. 괜찮지?" 그렇게 우리 팀은 모두 같이 회식을 했고, 밤늦게까지 승진자들을 축하해 주었다. 돈은 승진자들끼리 N빵 했다. 한우에 이어 2차, 3차까지 가서 그런지 N빵을 해도 금액은 상당했다. 하지만 뭐 어떠랴? 이렇게 날 가족같이 생각해 주는 부장님과 팀원들이 있는데,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난 코가 비뚤어지게 잔뜩 취한 백부장님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귀가했다.


(다음 날)


 주말이라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툴툴대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잠에서 깨어났다. 전날 세탁기를 돌린 첫째의 바지 주머니에서 이상한 게 나오는 바람에 빨래를 망친 것 같았다. "어제 벗어둔 정장 정리하다가 나온 건데, 이거 뭐야? 너무 기분 낸 거 아니야?" 아내가 내민 손 위에는 어제 거하게 긁은 카드 전표와 볼펜이 올려져 있었다. 볼펜을 보자 잡상인 선생님이 떠올랐지만, 지금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아 그거 백부장님이 빌려갔다가 어제 돌려준 거야. 감쪽같이 펜으로 보이지? 근데 그거 비밀 녹음기야."

 그렇게 (첫째의 곡소리를 들으며) 평화로운 오전을 보내고, 난 책상 앞에 앉아 밀린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재밌게 보고 있는데 문득 옆에 놓인 볼펜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볼펜의 단자를 열고 노트북과 연결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다. 난 천천히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녹음파일 #001

: 메모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냥 편하게 들으세요. 제가 이렇게 백부장님을 뵙자고 한 이유는 부서장 의견을 좀 듣고 싶어서입니다. 경영관리팀에 과장 승진 대상자가 두 명 있죠? 정수진 님하고 윤현섭 님. 물론 두 분 모두 승진시키면 좋겠지만, 부장님도 아시다시피 요즘 회사 실적이 별로 좋지 않아서요. 어쩔 수 없이 한 명만 올려야 하는데 부장님 생각은 좀 어때요?

: 실장님!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데, 어떻게 저희 부서의 이익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겠습니까? 저희 부서에서 한 명도 승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상자들에게는 제가 잘 설명할 테니 회사 방침에 따라 처분해 주시길 바랍니다.

: 지금 뭔가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굳이 그런 얘기를 안 해도 결정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괜히 불필요한 소리 하지 말고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적합한지만 말씀해 보세요.

: 아! 죄송합니다. 실장님! 제가 주제넘은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굳이 꼽는다면 저는 윤현섭 님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입사원 때부터 경영관리팀에 배치돼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고, 지시한 업무는 끝까지 성실하게 처리하는 친구입니다. 게다가 정수진 님은 경력직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애를 돌보느라 매일같이 칼퇴근을 해야해서 팀에 기여한 바가 별로 없습니다.

: 저도 같은 생각이긴 한데, 현섭 님이 승진 소요연수 4년을 다 채우지 못한 게 맘에 걸려요. 그 친구 대리도 2년이나 먼저 특진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번에도 특진이잖아요. 그러게 왜 휴직은 해가지고. 아 참! 그리고 현섭 님이 특진하면, 백부장님 승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아시다시피 특진은 부서로 배정된 승진 TO를 두 개 잡아먹잖아요.

: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현섭 님을 굳이 이번에 올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리 승진도 동기들에 비해 2년이나 빨리 했고, 올 초에는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간신히 달래서 휴직을 쓰게 하긴 했는데, 그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혜택을 누린 겁니다. 직장인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바로 회사에 대한 로열티, 즉 충성심 아닐까요? 실장님도 아시다시피 전 대졸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지금까지 25년간 회사만을 바라보며 달려왔습니다. 처음 경영관리팀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제 충성심을 인정받은 것 같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도 승진에서 누락된다면, 저에게는 회사를 떠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실장님!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녹음파일 #002

: 어 그래. 정확히 받아 적었어. 내가 다시 한번 불러 볼게. 621-824985-02-100 Bank of America 맞지? 아빠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 딸!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지? 아빠가 더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밥은 먹었냐고? 그럼! 지금 점심시간이라 팀원들이랑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왔지.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몸만 잘 챙겨. 아빠가 조만간 가서 다 해결할게. 오히려 생각하지도 못했던 손주가 생긴다고 하니까 더 좋네.

: 6417번 고객님! 주문하신 빅맥세트 나왔습니다!


녹음파일 #003

: 어이! 아가씨! 이 카드로 계산하고, 빨리 전표 가져와. 서명하게!

: 아이고 부장님! 제가 모시는 게 당연하죠. 서운하게 왜 그러세요.

: 딸꾹! 아냐 윤 과장. 승진 너무 축하하고 이건 내가 쏘겠네. 마무리하고 우리 집에 가서 딱 한 잔만 더하세. 이렇게 기쁜 날은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자고!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해장하고 가! 내가 새 속옷이랑 양말도 빌려주겠네. 잠깐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 참! 그리고 이 볼펜 내가 급하게 실장님 보고 들어가다가 자네 자리에 있는 걸 허락도 없이 빌려 썼네. 괜찮지? 근데 별로 좋은 건 아닌가 봐. 이상할 정도로 볼펜똥이 많이 나오더군. 자! 가지고 가게.


 이렇게 난 상쾌한 진실을 알았고, 이 세상 무엇보다 인간 가장 두려워하는 오바 요조를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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