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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Oct 10. 2023

연극

진나소?

 큰일이다. 한 달 동안 윤현섭이라는 부캐에 푹 빠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들통난 것 같다. 최근 틈만 나면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울고, 웃고 으니 그럴 만도 하다. 처음에는 '남편이 실성한 게 아닐까?'라며 날 걱정해 주던 아내도 어느 순간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의 사주를 받은 1, 2, 3호기는 불쑥불쑥 내 방으로 쳐들어왔다. "아빠 뭐해요? 야동 보는 거면 같이 봐요."라며 지 욕심을 챙기는 첫째, "super shy×2 wait a minute×2"라며 펄럭거리는 둘째, "아빠! 아빠? 아빠!"라며 버벅대는 멍청한 셋째까지, 나의 프라이버시는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른다. 아빠가 오랜 직장생활을 거치면서 Alt+Tab을 페이커 수준으로 잽싸누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 뭔가 갖고 싶은 게 있어서 러는 거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평화로운 토요일 오전이었다. 소파에 누워 다른 브런치 작가들의 주옥같은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터미네이터였다. 불길했다. 평소 터미네이터는 나에게 거의 전화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 뭔가 귀찮은 심부름을 시킬 것 같아 최대한 아픈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터미네이터의 용무는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 반주 끝났는데, 연극 보러 가지 않을래? 요즘은 안 해본 거 같이 하자는 사람이 제일 좋다며? (제44화 드론 참조)" 난 벌떡 일어나서 침을 꿀꺽 삼켰다. "참!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지? 나야 당연히 우리 가족들이 제일 좋지." 수화기 너머로 터미네이터의 (가소롭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암튼 성당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준비하고 나와."

 난 주말에는 항상 2시에 탁구를 치러 가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절대 약속을 잡지 않는다. 하지만 연극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선함이 운동욕을 이기고 말았다. 성당에 도착해 보니, 아내는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청바지에 모자를 눌러쓴 나는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물었다. "연극 제목이 뭐야?" 아내는 잘 모른다는 듯(니가 보자며!)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하더니 답했다. "진짜 나쁜 소녀. AKA 진나소." 아내의 얘기를 들어보니, 같은 곳에서 근무하는 친한 동료가 수없이 많은 헌혈 활동을 통해 받은 것이라고 했다. (Thanks to 마움/요한 아빠) 난 매혈로 얻은 피 같은 티켓을 우리가 쓰는 게 미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우리 집에 '진짜 나쁜 소녀(둘째)'가 있는데, 굳이 대학로까지 가서 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오랜만에 데이트라 그런지 아내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주말에는 '나부터 살아야지'라는 마음으로 가급적 차를 몰지 않는 게 원칙인데, 상대방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정류장으로 이동한 우리는 버스를 타고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이렇게 있으니 연애할 때의 (잊고 싶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예전에 너 강남역에서 양재역까지 이동하는 동안 잠든 거 기억나? 몇 초만에 코 골아서 얼마나 놀랐는데. (나 아님)" 그 기억 속에 우리는 20대의 끝자락에 서있었는데, 어느새 악마 셋을 키우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차만 타면 곯아떨어지는 아내가 갑자기 '안 해본걸 해보자며' 가방에서 공기팟을 꺼내 한쪽을 건넸다. 귀에 꽂자 소유의 양념반, 후라이드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사랑 노래를 들으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 '혹시 Unofficially Missing You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대인배답게 들고 있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아내의 무릎에 살짝 흘리는 선에서 넘어가 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찾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좀 봐. 애기가 너무 귀엽다." 얼굴을 들어보니 어떤 꼬마가 버스 창 밖으로 희망차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난 아내의 협박에 못 이겨, 이륙하는 비행기를 배웅하는 기술자들처럼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항상 밝게 자라나렴!) 그리고 주변을 보니 밝은 표정으로 꼬마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지만, 버스가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내 표정도 저렇게 보이겠지?)

 연극은 학폭에 시달리던 어떤 소녀가 복수를 실행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었다. 출연진이 5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연극이었는데, 1인 2~3역을 하는 배우들이 무척 인상 깊었다. 물론 과거에도 동료들과 연말 행사로 몇 번 연극을 본 적은 있었지만, 10년도 넘은 얘기고 피곤에 절어있어서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정상인이 되어 만난 연극은 TV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른 입체감이 느껴져서 신기했다. 어느 좌석에서 보느냐에 따라 배우들의 표정이 달랐고, 목소리의 울림도 달랐다. '이래서 N차 관람을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었다. 더 글로리가 살짝 연상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기쁨이 그걸 금방 덮어버렸다. "사람들은 용서보다 복수를 더 좋아해."라는 주인공의 대사로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더 이상의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길인 것 같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지 않고, 아내와 함께 종로 5가 역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내 손을 잡는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중년이 되어 테스토스테론이 마구 분출되고 있는 아내의 손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난 다급하게 가족끼리는 이러는 거 아니라는 말을 했지만, 피아노만 치던 고운 손이 이렇게(?) 된 게 좀 미안하게 느껴졌다. (나 안 만났으면 너도 좋고 나도 좋았잖아!) 역에 도착한 아내는 오늘을 기념할 수 있게 로또 복권을 사자고 말했다. '돈벼락을 맞고 싶다는 얘기를 저렇게 돌려서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난 순순히 아내와 함께 줄을 섰다. 주말 종로의 특징답게 로또명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몇 분이 흘렀을까? 우리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의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희망은 이것밖에 없어. 안 그래?" 난 궁금해서 뒤를 돌아봤고, 순간 할아버지의 얼굴 위에 겹쳐 떠오르는 '손 흔드는 꼬마'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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