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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Oct 11. 2023

명언

생각대로 살고 있나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화장실을 찾아서 우연히 어느 허름한 건물에 들어갔다가 본 문구다. 당최 누가 2사로에 들어간 현인을 괴롭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해우의 시간 동안 참 철학적인 생각을 하신 모양이다. 생각하는 대로(생체신호 접수) 살고 있는(2사로 진입) 나로서는 그냥 넘길 수도 있었지만, 용무를 마치고 난 뒤에도 그 문구는 계속 떠올랐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문장(말)을 마주하게 된다. 그중에서 오랜 경험을 통해 찾아낸 지혜가 녹아있는 글(말)을 보통 명언이라고 칭한다. 아까 본 문장이 명언집에 들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뭔가 움찔하는 포인트가 있었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쯤 온 나에게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냐는 질문을 던졌다.    

 사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특별히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판단 내려진 좋은 대학을 가는 게 목표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삶은 무미건조 그 자체였다. 물론 중간중간 즐거운 기억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나의 머리를 괴롭히느라 보낸 시간이었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당장 오늘 먹을 식량도 없는 사람에게 건강하려면 소식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야말로 공부를 제외한 모든 시간이 사치였던 것이다. 난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정해진 분량을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지극히 평범한 난 간절히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 농구 대잔치를 보며 항상 동경해 온 대학이었다. 원하는 대학(과)을 들어갔으니, 한동안 나의 어깨뽕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난 몰랐다. 대학 졸업장은 그저 입장권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 입장권은 많은 사람에게 발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큰 의미가 있지만, 어차피 입장권이 없는 사람은 별로 만날 일이 없었다.     

 난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입장권을 가지고 회사의 문을 두드렸고, 운 좋게 네 군데에 복수합격했다. 그중에서 왜 자동차 회사를 가지 않고 XX를 갔나 생각해 보면, 참 황당하다. 회사의 규모나 비전 등을 따져보지 않고 그저 본사가 지하철 역에서 가까운 XX를 선택한 것이다. 아무리 요즘 직주근접이 대세라지만, 지금 생각해도 좀 이상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차차 알게 되었고, 지금은 '첫 단추를 잘 못 끼운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선택한 회사도 나름 잘 나가는 대기업이었고, 특히 참신한 이미지를 앞세워 항상 대학생이 가고 싶어 하는 회사 리스트 최상단에 위치해 있었다. 즉 과거로 돌아가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내가 갑이라고 생각했다. 별 어려움 없이 회사를 골라 들어가기도 했고, 마음속엔 항상 플랜 B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배치된 부서에서 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잔뜩 기대하고 만난 핵심 부서 사람들의 실력은 생각보다 시원찮았다. 다들 대표이사의 지시를 주워섬기기 바빴고, 비판적인 의견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야말로 갑자기 '까라면 까는 세상'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다른 의견을 제시했던 나도, 몇 번의 부침을 거치자 어느새 앵무새 7호가 되어 있었다. 위로 가면 갈수록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분명 일을 통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내 동료들 중엔 그런 사람은 딱히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두들 마치 회사가 인생의 전부인 양 연기하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회식, 그리고 다음 날 마주하는 냉정한 공기가 날 지치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일에 대한 기대를 접은 건 아내 덕분이었다.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아내조차도 일을 통해 보람을 느끼기는커녕, 살아가면서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미션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가장 성실한 사람이 하는 얘기라 그런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난 마음이 아팠다. 지금 이곳에서 버티면 찾아오는 미래는 저 멀리 앉아 손톱을 깎고 있는 부장님이 되는 것 이외엔 별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다급해진 난 플랜 B를 찾는다고 알아봤지만, 그건 플랜 A'에 불과했다. 오너가 있는 사기업은 기본적으로 존립하는 목적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회사의 목적은 이윤의 극대화이고, 그런 면에서 볼 때 직원들의 고혈을 짜내는 구조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회사가 개인에게 지불한 인건비의 3~4배를 뽑아내야 겨우 만족하 불공정 계약.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선택지는 둘로 좁혀졌다. 1번 어차피 어딜 가나 비슷하니 그냥 버티자, 2번 아예 다른 직업군으로 갈아타자. 당시 셋째가 막 태어난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암흑기를 지나고 있었다. 아내가 휴직을 하는 바람에 수입은 줄고, 나의 업무량은 피크를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추운 날 사무실 한켠에 있는 어두운 서고에 누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난 지옥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운 좋게 완전히 다른 직업군으로 넘어왔다.

 처음 이쪽으로 넘어와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수평적인 의사소통 구조와 업무량이었다. 평균 근속연수가 30년 가까이 되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가장 조심하는 건 다른 사람과의 불화였다. 누군가를 쪼아가며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전 회사였다면 5명이 할 분량을 15명이 나눠서 하고 있었다. 오너가 있고 없고는 생각보다 큰 차이였다.

 난 갑자기 주어진 잉여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했다. 매일 정시에 퇴근했으며, 취미를 갖고 열심히 건강을 챙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며칠만 지나도 얼굴이 확확 바뀌는데, 전에는 그런 변화를 관찰할 시간이 없었다. 이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내가 아빠로서 좀 더 많은 역할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하나의 결핍이 채워지니까 다른 결핍이 생겨났다. 회사를 다닐 때는 아무리 목표가 없다 해도 고위 임원이 되는 게 일반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내가 넘어온 업계는 그런 목표 자체가 별로 의미 없는 곳이었다.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 구조가 아니고, 시간에 따라 급여는 자동으로 올라갔다. 이곳에서 열심히 하고 싶은 동기를 찾는 건 매우 어려웠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적절한 보상을 받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 극단에 위치한 두 조직 사이에서 각각의 장단점을 비교해 온 나는 어느새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다.

 이제는 다른 업계로 넘어갈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이미 확정되어 버린 안락한 20년이 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의 돌발행동으로 우리 가족의 소중한 일상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은 꿈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글을 남기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 서머싯 몸이 수많은 작품을 통해 나에게 영감을 주었듯, 나도 누군가의 감정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더 이상 난 스스로에게 뻔한 변명을 하고 싶지 않다. 그곳이 어디든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가볼 이며, 도착한 곳에서 만난 게 운명이 아닐지라도 기꺼이 삼킬 것이다. 죽는 날까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나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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