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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Oct 12. 2023

연마

磨斧作針 / Non sum qualis eram

 내 입장에서 아시안게임은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비해 관심도가 많이 떨어진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처음 '국제대회'라는 걸 인식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어언 35년 전 88 올림픽 즈음이었다. 강산이 세 번 반쯤 바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내 기억 속에는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 코리아나, 칼루이스 VS 벤존슨, 손톱으로 국 끓이는 그리피스조이너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만큼 어린애가 보기에도 임팩트 있는 순간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을 생각하면,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별로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구기종목 스타들이 군대를 면제받기 위해 목숨 거는 대회'라는 정도뿐이다.

 그러나 이번 아시안게임만큼은 꼭 보고 싶은 종목이 있었다. 제 글을 꾸준히 눈팅 중이신 고마운 독자들은 아시겠지만, 바로 2.7g의 마술 '탁구'다. (탁구의 효능이 궁금하신 분은 제43화 취미 참고) 그중에서도 전지희, 신유빈이 짝을 이룬 여자복식은 꼭 보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전지희 선수는 한국으로 귀화한 중국인이다. 중국에서 청소년 대표로 발탁된 적도 있으나, 결국 성인대표의 높은 벽은 넘지 못했다. 양궁의 경우 올림픽 메달 보다 대한민국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게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중국 탁구의 성인대표가 된다는 것은 지구인 대표가 된다는 말과 동일하다.

 2014년부터 꾸준히 대한민국 대표로 선발되고 있는 전지희 선수는 가끔 우리 탁구장에 온다. 관장님이 포스코 선수단의 코치를 역임했기 때문이다. 전선수가 연습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임!영웅을 영접한 엄마와 같은 기분이 든다. 160도 안 되는 작은 키에서 어쩜 저런 파워와 민첩성이 나올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고백하자면 가만히 지켜보다가 침을 흘린 적도(왜?) 몇 번 있다. 처음 전선수를 본 이후로 난 열성팬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신유빈 선수는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워낙 오랫동안 미디어에 노출이 되어서 그런지 옆집에 사는 고등학생 느낌이다. 축구의 이강인 선수와 더불어 한국판 트루먼쇼의 주인공인 신유빈 선수는 실력뿐 아니라 고운 인성도 갖추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지금도 어리지만) 실업선수 생활을 해서 번 돈을 여러 곳에 기부하는 등 계속해서 선행을 이어가눈 중이다.

 이번 아시안게임 탁구 여자 복식에서 전지희, 신유빈 조는 일본의 천재소녀 하리모토, 키하라 조를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게임 스코어 4대 1에서 알 수 있듯이,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고비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난 매 포인트마다 하느님, 부처 핸즈 업, 알라신 등 모든 믿음(?)을 소환했다. 결국 해피엔딩이었지만, 게임이 종료된 순간에는 승자의 기쁨과 패자의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쏟아내고 흘리는 선수들의 눈물은 중년 아저씨인 나조차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만 이쯤에서 생각을 멈춰야 하는데, 초롱초롱한 신유빈 선수의 눈빛을 보다가 저쪽에서 널브러져 있는 막내를 보니 너무 비교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렇게(?) 역변한 막내도 뭔가를 열심히 연마하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 지나서야 이가 나기 시작한 막내는 또래에 비해 발육이 좀 늦었다. 신체적 자극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아내는 남자애들의 전형적인 학원루트(?)인 태권도에 막내를 집어넣었다.

 난 어릴 적 오랫동안 태권도를 다녀서(3단) 그게 얼마나 재밌는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태권도를 막 다니기 시작한 막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워낙 어리다 보니,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자애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내는 여자애들의 샌드백이 되어 매일 쥐어 터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런 막내가 적극적으로 바뀐 계기가 있었다. 바로 '품새 & 겨루기 대회'였다. 처음에는 미온적이었던 막내는 첫째의 도발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바로 전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첫째가 막내 앞에서 트월킹을 시전 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막내의 눈에서는 진짜 레이저가 나왔다. 그리고 저 바보 같은 형아가 하는 걸 자신이 못할 리 없다며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다음 날부터 막내는 태권도에서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격려하던 관장님도 한 달이 지나자 전혀 괜찮지 않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아버님! 너무 심하게 운동시키면, 오히려 키가 안 크는 역효과가 날 수 있어요."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태생적으로 비뚤어진 나는 "병원 가서 성장판 검사해 봤는데, 190까지도 자랄 수 있다고 하던데요."라며 관장님을 안심(?)시켜 드렸다.

 그렇게 참가한 품새 & 겨루기 대회에서 막내는 두 개의 금메달을 땄다. 품새 부문에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태권도 시범단 출신 아이를 꺾었고, 겨루기 부문 결승에서 만난 큰 여자애는 사진에 보이는 명품 옆차기로 물리쳤다. (지금도 헤드샷을 맞은 여자애의 부모가 외치던 쌍욕이 들리는 것 같다. 이해한다. 나라도 그럴 듯.) 그렇게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막내는 시상대 위에서 누구보다 밝게 빛났다.

 'Non sum qualis eram'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프랑스 작가의 작품에서 본 문구인데 '나는 과거(어제)의 내가 아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해석하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난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로 이해했다. 매일매일 나아지고 있는 느낌만큼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그게 무엇이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반복될 때 우리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충만한 오늘이 쌓이면 언젠가 위대한 미래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지금은 널브러져 있는 막내도 필요한 순간이 오면, 열심히 노력하여 성취한 경험을 꺼내 들고 날카롭게 휘두르지 않을까? 그때가 오면 난 다시 한번 외칠 것이다. 문동은 느낌으로다가. "짝짝짝! 파이팅 윤막내! 브라보! 멋지다 막내야! 워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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