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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Oct 13. 2023

이어 달리기

금손

 손재주가 매우 뛰어난 사람을 우리는 보통 금손이라고 부른다. 가끔 아이들이 보는 쇼츠를 옆에서 같이 보고 있노라면 금손을 넘어 다이아손, 신의손(feat. 마라도나)에 도달한 사람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들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앞에 앉은 사람의 초상화를 쓱쓱 그리기도 하고, 아주 긴 시간 동안 집 한 채를 뚝딱뚝딱 만들기도 한다. 글 몇 줄을 뽑아내는데도 머리를 제법 많이 써야 하는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굳이 정신승리를 시도해 보자면, 그렇게 엄청난 재능을 지닌 사람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없다는 정도? 그렇기 때문에 (만수르처럼) 뭔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인간이라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우리 집에 있다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금손을 장착한 터미네이터다.

 지금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아내는 원래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다. 처음 피아노에 입문하자마자 큰 흥미를 느낀 아내는 고등학교까지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며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IMF가 터지고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장모님은 냉정한 판단력을 발휘하여 발레 하는 처제의 손을 들어줬다. 애 셋을 키우면서 그중 두 명을 예체능 교육까지 시켰으니, 장인/장모님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셨을지 짐작이 간다. 피아노를 그만둘 당시에는 매우 아쉬워했던 아내도 지금은 장모님을 이해한다. 계속 피아노를 쳤어도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며, 무엇보다 스스로도 처제의 재능이 훨씬 뛰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과론적 얘기지만 장모님의 판단은 정확했다. 열심히 노력한 처제는 선화예중을 수석으로 입학하여 오랜 기간의 해외 유학을 거쳐,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박봉인 동생을 위해 고가의 토슈즈를 몇 켤레씩 사주며, 아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평소의 인성으로 미루어 볼 때, 시샘보다는 자신의 비자발적(?) 희생이 결국 결실을 이뤘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지금은 발레를 쉬며 4명의 육아에 열중하고 있는 처제도 아내에게 여러 가지로 많은 보답을 하고 있으니, 참 좋은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마무리된 줄 알았던 아내의 금손은 지금도 십분 활용되고 있다. (요리는 절대 아님) 처음에는 엄마의 혹독한 지도를 온몸으로 거부했지만, 결국 아이들은 모두 수준급의 피아노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둘째는 처음 참가한 콩쿠르에서 입상할 정도로 피아노를 좋아하며, 요즘도 공부는 절대 안 하고 베짱이처럼 건반만 두드리며 시간을 보낸다. 새끼손가락이 짧아 슬픈 짐승인 나로서는 기분 좋은 소외감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특히 가끔 연주회를 보러 가면 나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다양한 감상평을 공유하는데, 역시 모든지 아는 만큼 보이는 모양이다. 엄마를 통해 악기 다룰 수 있게 되고, 그게 아이들의 인생을 좀 더 풍요롭게 해준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학원비도 많이 아끼고)

 문득 '인생은 이어 달리기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환호와 스포트라이트는 결승선을 통과한 마지막 주자가 받지만, 앞에서 열심히 뛰어준 동료가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만,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언젠가 멈추어야 할, 혹은 벌써 멈춰진 지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걸까? 매일매일 꿈을 향해 한 발씩 앞으로 내딛는 것 자체가 바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산다'는 증거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멋있는 법이다. (자뻑?) 그리고 혹시 운명이 나를 조연으로 택할지라도 누군가 나의 꿈을 열심히 이어 달려 줄거라 믿는다. 마치 내가 활이 되어 쏘아올린 화살이 언젠시간이 흘러 과녁을 정확히 명중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운명님! 그래도 이왕이면 주인공이 되게 해주세요! 플리즈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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