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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Oct 17. 2023

성묘

된장찌개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엄마가 준비한 아침상이 내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쉬는 날 나를 움직이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떠먹자, 갑자기 나라는 인간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제 엄마가 외할아버지 산소에 가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다름 아닌 '귀찮다'였다. 월요병을 심하게 앓는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닌 주제에, 난 일요일에 외부 일정을 잡는 걸 많이 꺼린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탁구 때문이라니,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참 어이없다 느꼈을 것이다. '외손주 예뻐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말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닐까? 아침 일찍 갔다 오자는 엄마의 설득이 없었더라면, 아마 난 끝까지 고민했을 것이다. (오후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씻고 엄마집에 도착하니, 동생은 벌써 와 있었다. 우리는 엄마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음식은 엄마가 준비했, 운전은 동생이 한다. 그런잠깐 시간 빼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가지 않을 이유부터 찾고 있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비겁한 인간이다. 그리고 어제 내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귀찮음을 엄마가 분명히 느꼈을 거라 생각하자 너무 부끄러웠다.

 꽉 막힌 내 기분과는 반대로 산소 가는 길은 뻥뻥 뚫려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조회해 보자, 도착까지 약 45분이 걸린다고 표시되었다. 추석 연휴에 왕복 5시간이나 걸려 친할아버지 산소를 다녀왔으니, 45분은 그야말로 껌이라고 느껴졌다. 시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산소를 찾는 엄마의 표정은 한층 밝았다. 장성한 아들들을 데리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를 달리고 있으니, 기분이 좋은 것일까? 품 안의 자식이란 말처럼, 가정을 이룬 후의 나는 온통 우리 집에만 신경을 쏟았다. 애들이 어렸을 때야 그럴 수밖에 없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요즘도 모님을 자주 찾지 않는 걸 면 그냥 성격인 것 같다. 귀찮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 하는 비뚤어진 성격.

 이북 출신 외할아버지는 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와 맨손으로 일가를 이뤘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목장일을 돌봤고, 쉬는 날에는 서예를 통해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이룬 성실한 분이었다. 정작 본인은 많이 힘들었겠지만, 덕분에 자녀와 손주들이 잘 살고 있으니 뿌듯해하실 거라 믿는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에겐 이룰 수 없는 꿈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북에 있는 고향방문이다. 외할아버지가 이북에서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 아는 가족은 한 명도 없다. 다만 가끔 들려줬던 얘기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언젠가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을 보면서 몰래 눈물을 훔치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외할아버지의 눈물은 누군가를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결국 돌아가시는 날까지 고향에 가보지 못 한 고인을 위해 가족들은 파주에 위치한 실향민 공동묘지에 외할아버지를 모셨다.

 묘지에 도착하자 도시와는 다른 공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곳의 공기는 더 맑았고 더 차가웠다. 그리고 청명한 하늘에는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가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엄마는 기러기가 끼룩거리는 쪽을 한 번 흘끔 보고는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준비해 온 가방에선 우유, 명란젓, 불고기, 호박전, 약과 등 할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다. 나와 동생은 엄마의 지시에 따라 음식을 여기저기 놓았고, 곧 제사상은 빈틈없이 빽빽하게 채워졌다. 모든 음식이 제자리를 찾을 무렵 엄마는 입고 있던 외투에서 하얀 보온병을 꺼냈다. 아마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따뜻한 믹스커피가 들어있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안에 들어 있던 건 된장찌개였다. 엄마는 묵묵히 보온병을 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된장찌개를 그릇에 따라 제사상에 올렸다.

 받은 술잔을 허공에 몇 번 돌린 후, 엄마는 절을 올리기 위해 천천히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앞으로 숙였다. 1초, 2초, 3초. 금방 일어날 줄 알았는데, 10초가 넘도록 엄마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 죄송해요. 도대체 이깟 된장찌개가 뭐라고, 못 드시고 가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돌아가시기 직전, 외할아버지는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부족한 병상을 비집고 들어간 만큼 다인실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에서 된장찌개를 드시고 싶다고 얘기한 모양이다. 엄마는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외할아버지를 설득했다. 조금만 참았다가 다 나으면 집에 가서 먹자고. 그러나 할아버지는 결국 된장찌개를 드시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엄마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요청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엄마의 눈물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하지만 옆에서 몰래 눈가를 훔치는 나는 안다. 이 세상 어떤 아빠이 후회하거나 슬퍼하길 바라진 않는다는 것을. 아빠를 위해 멀리까지 품어온 따뜻한 보온병이면 그걸충분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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