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와 맥주
요즘 도서관에 가면 거의 자동으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코너로 향한다. 하루 사이에도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독자는 본인의 취향에 맞는 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고, 그런 면에서 볼 때 민음사와 세계문학전집이라는 두 단어가 주는 안정감은 나를 불안한 선택 장애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다. 최근 내가 푹 빠져있는 작가 서머싯 몸의 말년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을 선택할 이유는 충분했고 케이크와 맥주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가벼움이 좋았다. (작품을 읽는 내내 케이크와 맥주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고, 나중에 작품 설명을 보고 그게 세속적 쾌락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주인공 윌리 어셴든은 친구 앨로이 키어가 준비한 의도적인 식사 자리에서 최근 작고한 유명작가 에드워드 드리필드와 관련된 사실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윌리는 에드워드 드리필드의 전기를 쓰게 되었다는 로이의 부탁이 썩 내키진 않았지만 에드워드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윌리는 성직자인 숙부와 함께 블랙스터블에서 성장했다. 대부분의 소규모 지역 공동체가 그렇듯 블랙스터블 사람들은 배타적이고 보수적이어서 사회적 계급이나 직업의 귀천을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집단이다. 그리고 그런 집단의 시선으로 볼 때 술집 여급과 결혼하여 블랙스터블에 정착한 귀족 집안 관리인 출신의 아들 에드워드 드리필드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로지 드리필드(에드워드의 아내)가 술집에서 일하면서 여러 남자들과 붙어먹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주민은 없었기 때문에 주인공의 숙부 역시 그 부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조카가 그들과 어울리지 않도록 조심시켰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를 통해 윌리는 드리필드 부부와 자전거를 함께 타게 되고 그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면서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윌리는 술집 여급 출신이라는 로지의 태연한 고백에 경악하고 그 사실을 다 알고도 그녀와 결혼한 에드워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국 꾸밈없고 순수한 로지의 매력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해를 거듭하면서 이어진 그들의 교류는 윌리가 의대생이 되어 런던으로 떠나가게 되고 드리필드 부부가 야반도주를 하면서 끊어지게 된다. (드리필드 부부가 도주하면서 일으킨 물의는 너무 다양해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몇 년 후 우연히 런던 거리에서 로지를 만나게 된 주인공은 그 부부가 런던에 정착했고 에드워드는 차츰 이름을 알려가고 있는 작가가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잠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블랙스터블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냐는 로지의 태연한 질문에 다시 한번 경악했지만 그녀와의 교류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곧 불쾌함을 가려 버린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점점 커지고 은밀하게 변형되어서 윌리는 로지의 애인이 된다. 과거 어린 시절 블랙스터블에서 조지 켐프와 몰래 만나는 로지를 목격한 적이 있는 윌리로서는 본인이 유일한 애인은 아닐 것이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지만, 곧 그런 의심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그녀에게 빠지게 된다. 황금빛을 띠는 금발, 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얼굴, 투명한 피부에 서린 푸르스름한 기운, 육감적인 빨간 입술과 몸매까지 로지의 모든 것에 매혹된 윌리는 의대생으로서의 바쁜 생활 가운데에도 최대한 시간을 내어 그녀와 즐겁게 보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지가 조지 켐프와 다시 한번 잠적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은 큰 충격에 빠진다. 주인공은 드리필드 부부의 집을 매주 방문하고 있었고 바로 직전 만남에서조차 그런 징후를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가면서 기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로지와의 이별과 함께 주인공의 과거는 막을 내리고 현재로 돌아와 친구 로이와 함께 작고한 에드워드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두 번째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거기서 주인공은 로지를 저급한 여자로 치부하는 그들의 발언에 불편함을 느끼고 맞서 싸운다. (본인이 로지의 애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필요 이상으로 열변을 토하면서) 그리고 본인만이 알고 있는 에드워드와의 추억은 공개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미 전기의 방향을 정한 로이와 에드워드의 미망인을 볼 때 뭔가를 더 보태는 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주인공은 홍보차 방문한 뉴욕에서 로지를 만나게 되고 늙어버린 그녀로부터 에드워드의 작품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모든 작품은 현실을 토대로 만든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은 작가의 성장과정에서 발생한 사건과 그에 따른 느낌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로지라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면서 본인이 사랑에 빠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게 된 후 잠적한 로지를 뉴욕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밋밋한 감정은 다소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녀의 다른 정적이 선물한 값비싼 물건을 보며 한없이 질투하고 자책했으며, 작가 스스로도 의학보다는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강했던 예민한 시기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로이와 에드워드의 미망인 앞에서 그런 변호를 했겠는가!) 돌이켜보면 로지에 대한 작가의 사랑은 닳고 닳은 모습이 아니었고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그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로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조지 켐프와 미국으로 달아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조지 켐프였으며,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저명한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와서 그런 감정을 토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그런 행위를 통해 자기가 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