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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Oct 24. 2023

아빠 노릇

ADEX 2023

분하지만 인정한다. '안 해본 걸 같이 하자는 사람이 제일 좋다'는 발언은 경솔했다. 이때다 싶어서 뭔가를 자꾸 물어오는(?) 터미네이터를 보니, 스스로 발등을 찍었다는 생각이 든다. 교묘한 생명보험 약관처럼 저 문장 뒤에 '가족은 제외하고'라는 문구를 꼭 넣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금요일 저녁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아내가 내 앞에 뭔가를 툭 내려놓았다. "같이 근무하는 분이 어렵게 구한 건데,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간다고 나한테 줬어. 갈래?" 제안을 가장한 강압적 목소리를 듣자 반항심이 불쑥 올라왔다. 그 회사는 '만약 일이 틀어지면 다둥이 엄마에게 모든 걸 양도한다'는 규정이라도 있는 것 같다. 아내가 받아온 티켓은 두장이었다. '지난번 연극처럼 둘이 가자는 건가. 이상하네. 여자들은 분명 군대 얘기를 가장 싫어한다고 했는데'라는 생각에 빠져있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이(첫째)랑 둘이 오붓하게 다녀오라고" 그렇다. 이건 분명한 아내의 술책이었다. 일단 아들하고는 무엇을 해도 절대 오붓할 수가 없다. 게다가 가장 많이 먹는 두 사람이 없으면, 제일 큰 수혜를 입는 사람은 아내였다. 순간 난 물귀신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스마트폰 검색을 통해 지금도 충분히 티켓을 구할 수 있다며, 아내를 압박했다. "이 나이에 비행기 날아댕기는 거 봐서 뭐 해. 혹시 애들이 파일럿 되고 싶다고 할 수도 있잖아. 다 같이 가자." 내 말을 들은 1/3호기는 사춘기에 진입한 남자애들 답게, '시력이 안 좋은 우리들은 절대 파일럿이 될 수 없다'라고 반발했다. 다급해진 난 라식수술도 있지 않냐는 다정한 말투로 애들을 유인하여, 허벅지 안쪽을 쥐어짜는 고통을 선사했다. 그렇게 아이들의 반란은 간단히 진압되었다.      

 다음 날은 새벽부터 눈이 번쩍 떠졌다. 국민학교 시절 주말에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났는데, 8시에 시작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도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새벽부터 심한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난 ADEX 2023 홈페이지를 클릭했다. 전날 기상에 따라 에어쇼가 취소될 수도 있다는 공지를 봤기 때문이다. 먹통인 홈페이지를 보자,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참 많구나'라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9시쯤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가 멈추고 하늘은 파랗게 변했다. 블랙 이글스 대원 중에 짙은 파란색을 극혐 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비행기는 무조건 뜰 수밖에 없는 날씨였다. 한가닥 희망을 접은 난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모란역에서 내려 천천히 전시장으로 걸어가는데,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93년 대전 엑스포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 연인, 웬수(?) 등 다양한 조합의 사람들은 밝은 표정으로 파란 하늘 아래를 걷고 있었다. 길가에는 양 옆으로 불법주차한 차량이 가득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티켓에 쓰인 문구를 보고 판교역에 주차한 게 너무 후회되었다. (나도 그냥 대충 불법주차 할 걸)

 전시장까지는 약 15분 정도 소요되는 꽤 먼 거리였으나,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F22의 시범비행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F22는 엄청난 굉음을 내며 하늘을 누볐다. 생각보다 큰 소리 때문에 귀를 막고 우는 표정을 짓는 아이도 있을 정도였다. F22의 기동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수직으로 솟아올라 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파일럿들은 자이로 드롭을 탈 때의 심장박동이 잘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블랙 이글스의 곡예비행이 시작되었다. 블랙 이글스는 8대가 한 팀이었다.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를 받으며 힘차게 하늘로 솟구친 블랙 이글스는 다이아몬드, 알바트로스 등 다양한 형태의 기동을 선보였다. 특히 좌우에서 전속력으로 날아오다 핸들(?)왼쪽으로 화악 틀어 스쳐지나가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광경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기 꽁무니에서 나오는 연기로 만드는 태극무늬와 하트를 보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나도 매주 아이들과 함께 어디론가 놀러 가는 계획을 세울 때가 있었다. (파워 J 아내는 나를 부려먹으려고 절대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성장하고 마침(?) 코로나를 겪으며, 가족단위의 외출은 점점 줄어들었다. 요즘은 7~8월에 가는 여름휴가를 빼곤 거의 돌아다니질 않는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특정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법인데, 최근 몇 년간 날 귀찮게 하지 않는다고 좋아했으니 참 한심하다. 이제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애들을 데리고 좀 더 많이 돌아다녀야겠다.

 블랙 이글스의 화려한 공연이 끝나고 많은 인파에 휩쓸려 모란역 쪽으로 이동하는데, 관객들을 향해 푯말을 들고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푯말에는 소이탄 때문에 엄마를 잃은 아이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었다. 증언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방위산업이 전쟁을 먹이 삼아 성장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실시간으로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ADEX 2023 관련 영상을 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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