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헌

090703

by 윤현섭

'주여! 간절히 청하오니 받아주옵소서. 저를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주님의 종으로 다시 태어나는 오늘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미천한 제 목숨 바쳐 봉사하겠나이다. 주님의 영광을 전하며, 주님의 나라가 오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과 뒤에서 묵묵히 지지해 준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도 기도드립니다. 신앙심 깊은 그들이 없었다면, 저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세족식을 하기 위해 벗겨진 부모님의 맨발을 보며, 간신히 눈물을 참았습니다. 저를 위해 희생한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주님께 저를 온전히 드릴 수 있어 무엇보다 기쁘다고 하셨지만, 은혜를 갚지 못 한 채 그들을 떠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가엾은 부모님을 굽어 살피소서.

바닥에 엎드려 보니, 조금이나마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천주의 자녀로 이 땅에 오시어, 누구보다 낮은 자세로 핍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신 주님. 저도 당신이 걸어간 길을 따르겠나이다. 어둠 속을 방황하는 사람들을 지나치지 않으며, 항상 주위를 밝게 살피겠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제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바로 오늘 제 평생의 꿈을 이루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제가 그럴만한 자격은 있는지, 주님을 향한 믿음이 부족한 건 아닌지 고민입니다. 겸손을 다해 청하오니, 사제로서 마주하게 될 모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또한 악에서 저를 구하옵소서.

주님의 자녀들이 본당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주님을 대신하여 축복을 전할 수 있는 힘을 내려주소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그들은 주님의 자녀이옵니다. 그들이 항상 주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살피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소서. 지금 이 순간, 저는 맹세하나이다. 앞으로 가야 할 길 위에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걸어가겠습니다. 부디 저에게 마르지 않는 용기와 바위처럼 굳은 의지를 허락하소서. 아멘.'

그날 내가 사람은 친숙한 고등학교 후배가 아니었다. 그는 살아있는 신의 증거였으며, 더 나아가 충실한 신의 대리인이었다. 사제가 된 그는 감격스러운 표정과 함께, 넘치는 신앙심에 휩싸여 전율하고 있었다. 그가 다가와 떨리는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감쌀 때, 형언할 수 없는 밝은 빛이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난 조금이라도 놓칠세라, 간절한 마음으로 그가 전달하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 그의 앞 날에 끝없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도하면서. 그의 굳은 신념이 내 머릿속 논리를 압도했고, 미지의 무언가를 향해 온몸을 내던질 수 있는 헌신이 부러웠다. 나는 언제쯤 가지고 있는 밑바닥까지 몽땅 게워내고 싶은 존재를 만날 수 있을까. 과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엄마! 할머니집 도어록 비밀번호 까먹었어. 뭐였지?"

"그걸 못 외우니? 090703이잖아"

"아 맞다! 근데 왜 090703이야?"

"2009년 7월 3일은 할머니, 할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날이거든."

"내가 태어난 날이 제일 기쁜 날 아니었어? ㅎ 근데 그날이 뭐였는데?"

"삼촌이 사제서품을 받고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날."

"뭐야 그게 ㅎ 삼촌은 태어날 때부터 사제가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름이 곧 하늘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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