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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Mar 13. 2024

꽃지

 누군가를 만나기 한 시간 전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장담한 여우가 된 기분이야. 아니지. 엄밀하게 따지면 네가 퇴근할 때까지 두 시간 넘게 남았으니까 행복한 나무늘보가 된 기분이야. 혹시 나무늘보라는 동물을 아니? 언젠가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로 쓰이기도 했는데. 순진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긴 발톱을 가지고 있고, 털에 이끼가 낄 정도로 느린 동물이야. 네가 아무리 바빠서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 해도, 나무늘보 정도는 간단하게 추월할 수 있어. 그렇다고 너무 우월감을 갖지는 마.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자이언트 나무늘보가 여태껏 살아있다면 얘기는 달라질 테니까. 아무튼 인간이 볼 때 나무늘보는 너무 느려서 답답하지만 그건 우리 편한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정작 나무늘보는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을 찾았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걸 수도 있잖아. 플랭크를 생각해 봐. 엄청 오래 버텼다고 생각하며 타이머를 봐도 고작 22초 정도 흘러있잖아. 시간은 상대적인 거라는 간단한 얘기를 하기 위해 너무 이상한 예를 들이대서 미안해.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꽤 길게 느껴지는 두 시간도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금방 지나간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 그럴까?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오늘은 월요일이고 아침부터 부서회의다 뭐다 준비할 게 많았어. 나름 꼼꼼하게 한다고 했는데, 백부장님이 제대로 하라고 많이 혼내더라. 내 잘못이지만 나도 남의 집 귀한 자식인데 너무 속상했어. 팀원들 앞에서 꾹꾹 참고 화장실로 들어가 소리 죽여 울었어. 울고 나니 조금 후련해지더라. 눈화장을 고치고 사무실로 갔는데 백부장님이 미안했는지 아아 한잔을 건냈어. 손바닥에 전해지는 차가운 느낌과 함께 번쩍! 네가 떠오르더라. 왜 그랬는지는 나도 설명하지 못하겠어. 그냥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나 봐. 눈치를 살살 보며 오전 시간을 때우고 백부장님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타이밍에 반차를 쓴다고 했어. 둔한 너는 잘 모르겠지만 '쓰고 싶다'와 '쓴다'는 엄연히 다른 표현이야. '쓴다'는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는 통보지. 백부장님은 아침부터 날 쪼아댄 게 미안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했어.

 주차장으로 내려와 네가 일하는 곳을 검색해 보니 1시간 반정도 걸리는 거리더라. 나 초보운전인 건 알지? 언젠가 자동차 뒷창문에 붙여놓은 문구를 보고 네가 놀렸잖아. 300포인트로 뽑느라 잉크 많이 썼겠다고. 게다가 초행길이라 겁도 조금 났는데, 그냥 나를 믿기로 했어. 남산을 옆으로 끼고 차를 달리는데, 바람을 타고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어. 노란 햇빛, 향긋한 봄바람, 그리고 분홍색 꽃잎까지 너무 완벽하지 않니? 봄을 만끽하고 싶어서 창문을 반쯤 내렸더니 모자를 쓴 유치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라. 그 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정차하고 있는 차를 출발시키기 싫을 정도였어.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 거짓말처럼 꽃잎 하나가 창문 너머로 날아와 운전대를 쥐고 있는 손등에 내려앉았어. 마치 누군가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집어서 살며시 놓듯이. 초속 10센티로 떨어지는 꽃잎이 손등에 착륙할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이따가 너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어. 수학 선생님이라면 응당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게 맞잖아. 이런저런 생각에 정신이 팔려 길을 번이나 들어간 끝에 겨우 도착했어. 2시간 넘게 걸린 건 안 비밀. 네가 일하는 가까이차를 세우고 천천히 주변을 걸었어. 50년 넘은 학교답게 조경이 아주 멋지더라. 이런 곳에서 매일 생활하는 네가 너무 부러워.

 그런데 아까는 꼭 그래야 했어? 교문에서 나오는 네 이름을 불렀을 때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어. 내가 무슨 고리대금 업자도 아니고. 아무리 학생들이 키득거렸어도 좀 웃어줄 수 있잖아. 내가 교문 앞을 틀어막고 버티지만 않았어도 어디론가 도망갈 것 같았어. 그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만약 도망쳤다면 더 크게 네 이름을 불렀을 테니까. 급하게 차에 올라탄 네 머릿속이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게 보였어. 그 시간에 그 곳에서 볼 얼굴이 아니었으니 무척 당황했겠지. 진하게 썬팅된 창문 너머로 기웃거리는 중딩들을 보며, 넌 일단 차를 출발시켰어. 학교에서 제법 멀어지고 나서야 넌 나에게 여기까지 왜 왔냐는 질문을 했지. 아침부터 깨지고 힘들어서 바람 좀 쐬고 싶었다는 변명(?)을 하긴 했지만, 너 바보니? 내가 여길 왜 왔겠어? 당연히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지. 그래도 다음 제안은 꽤 마음에 들었어. "그럼 꽃지 가볼래?" 그렇게 예쁜 이름을 가진 해수욕장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그리고 벚꽃 휘날리는 꽃지는 어떤 모습일까 무척 궁금했어.

 시원하게 뻗은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며 우린 많은 얘기를 나눴지. 내 차가 지붕이 열리는 스포츠카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마치 자유로운 델마와 루이스처럼. 중간에 들린 행담도 휴게소도 너무 좋았어. 대학 새내기 시절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를 보면서 궁금했는데, 그곳이 바로 거기일 줄이야. 네가 매점에서 사 온 호두과자와 바나나 우유는 또 어떻고. "점심도 못 먹었을 텐데 이걸로 요기라도 해" 언제부터 그렇게 다정해졌니? 설마 모든 여자들한테 스윗한건 아니겠지. 호두과자가 너무 뜨거워서 한 알씩 살살 녹여먹다 보니까 어느새 지에 도착했어. 우린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으로 걸어가서 담요를 깔고 앉아 떨어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지. 고요한 풍경과는 다르게 마구 뛰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어. 친구 덕에 좋은 구경하네 고마워. 사실 일출은 여러 번 봤지만, 일몰은 처음이었거든. 해는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을 던져 끌어당기는 것처럼 빠르게 바다 쪽으로 기대왔지. 저 해처럼 네 어깨에 기대고 싶은 마음을 넌 알까? 시간이 흘러 하늘과 바다와 모래와 내 맘이 모두 붉은빛으로 물들어 갈 때쯤 난 결심했어. 너에게 고백하기로.


"벚꽃이 손등에 살며시 내려앉을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거 너 만나러 올 때 창문 밖에서 흘러들어온 벚꽃잎이야"

"오늘 너무 진지한 거 아냐?"

"나 오늘 만큼은 조금 진지해지고 싶으니까 니가 이해해"

"어려운 문제긴 한데, 마음먹고 계산하면 못 할 것도 없지"

"그럼 우울한 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보며 누군가를 떠올릴 확률은?"

"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배고프니까 회나 먹으러 가자"


 그렇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너는 어서 일어나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꼭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어. 나름대로 괜찮은 답변이라고 생각해. 평소 쎈 척 해도 오늘 같이 완벽한 날 거절당할까봐 조마조마 했거든. 꽃지에 널 버리고 나 혼자 올라갈 순 없잖아. 오랫동안 간직해 온  받아줘서 고마워. 여긴 내가 계산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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