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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Mar 14. 2024

사감

 나는 사감이다. 종합 대학의 남자 기숙사동을 맡고 있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의 인생이 여기에서 뿌리를 내리게 될 줄은 몰랐다. 졸업 후 6개월이 지나도록 취업은 되지 않고, 학자금 대출액은 어느새 이자와 더불어 원금도 갚아야 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처음에는 나도 당연히 대기업의 문을 먼저 두드렸다. 지방 캠퍼스긴 해도 졸업장에 지역명이 박혀있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대기업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신촌 캠퍼스와 같은 경제학과지만, 제출한 증명서에 표기된 정경대학이라는 문구는 날 서류전형에서부터 번번이 탈락시켰다. 그렇게 스무 군데가 넘는 거절 끝에 지원한 중소기업에서 연락을 받았을 땐, 마치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것 같았다. 면접은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채 회의실로 들어가자,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질문을 시작했다. "요즘 아무리 취업이 어렵다고 해도, 우리 회사에 Y대 출신이 지원한 건 처음이라 꼭 보고 싶었네. 혹시 멘탈에 문제가 있나?" 사장의 질문을 듣자 멀쩡하던 멘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담당자의 실수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사 검증 시스템 자체가 없는 건지는 몰라도, 사장은 날 신촌캠퍼스 출신으로 알고 있었다. 젠장. 그 뒤로 형식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사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출근하라고 했다.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내 또래로 보이는 직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었다. "면접 교통비를 드리고 싶은데, 회사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대신 식권을 드릴 테니까 구내식당에서 점심이나 드시고 가시죠. 여기 이모님 손맛이 꽤 괜찮거든요. 헤헤." 난 그 자리에서 식권을 박박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통장 잔고를 떠올리며 말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마침 점심 무렵이라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내 차례가 되자 이모님은 처음 보는 얼굴이라며 반찬을 푸짐하게 담아 주셨다. "신입사원인가? 원래 비엔나소시지는 두 개 밖에 주지 않는데, 특별히 세 개 줄게. " 자리에 앉아 식판 두 번째 칸에 놓인 기다란 진미채를 보자, 갑자기 현타가 밀려왔다. '저기요. 신령님. 난 호랑이가 아니거든요. 독수리라고요. 그런데 왜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시나요?'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난 출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사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연봉을 50만원 올려주겠다고 했을 땐,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초과근무수당 전혀 없이 연봉 총액이 2,350만원임을 알고나자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수십 번의 시도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너덜너덜해진 나는 교내 취업 게시판에 올라온 사감에 지원했다. 급여도 적고 무엇보다 계약직이었지만, 일단 난 닻을 내릴 곳이 절실했다. 풍랑에 휩쓸려 완전히 난파되기 전에. 처음에는 후배들을 마주칠 때마다 전전긍긍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 꿈이 작가였던 건 몰랐지? 아무리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창작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직업을 잠시 택한 것뿐이야. 하하." 당시 그 작위적인 웃음을 떠올리면, 지금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어느덧 세월은 착실히 흘러 후배들은 모두 학교를 졸업하고, 나만 이곳에 남았다. 이거야 원 영락없는 여고괴담 아닌가.

 무슨 일이든 10년 정도 하면 전문성이 생긴다고 하는데, 사감 업무는 전문성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대신 학생들의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추 알아맞히는 눈치가 생겼다. 그들은 금지된 품목을 끊임없이 밀반입했다. 특히 출출한 시간대가 되면 어김없이 가방을 메고 어디론가 나갔다 돌아왔는데, 가방은 나갈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럴 때마다 난 최대한 위엄을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 잠깐 와봐요. 가방에 뭐 들었나 좀 보게." 쭈뼛쭈뼛하며 다가온 학생 열에 아홉은 마치 약속한 듯한 답변을 했다. "책밖에 없는데, 뭘 보신다는 거예요?" 식은땀을 마구 뿜어내는 이 핏댕이들은 블러핑의 기본도 모른다. 지금 도서관 문 닫았거든. 난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학생! 금지품목을 반입하다 적발되면, 퇴소 조치는 기본이고 손으로 쓴 반성문까지 제출해야 하는 기숙사 규정 알지?" (물론 그런 규정은 없다.) 이쯤 되면 다시 열에 아홉은 싹싹 빌기 시작한다. 가끔 끝까지 뻣뻣한 놈들이 있는데, 조심해야 한다. 수년 간의 경험상 그런 놈들은 꼭 뒷배가 든든하다. 아빠가 시의원이거나 아니면 엄마가 우리 대학 교수거나.

 아무튼 오늘 난 기분이 매우 언짢다. 설연휴 내내 창작활동에 매진하려던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계절학기를 수강하려고 신촌에서 온 학생들이 설을 쇠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자, 총장은 엉뚱한 생각을 해냈다. 바로 기숙사의 모든 방을 점검하고, 금지 품목을 적발하라는 지시였다. '요즘이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아주 빅브라더 납셨어!'라며 반발하고 싶었지만, 일단 꾹 참았다. 얼마 전 10년 이상된 계약직들을 대상으로 무기계약을 검토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A동에 배정된 다른 사감과 함께 오늘 하루종일 방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그 결과 사감 데스크 위에는 한 무더기의 콘돔이 쌓여있다. 하나, 둘, 셋, 넷... 총 열두 개다. 형형색색 메이커도 제각각. 이순신 장군님은 열두 척의 배로 왜군을 막았는데, 학생들은 고작 올챙이들이나 막고 있다니 너무 부럽다.

 인터넷 쇼핑을 하며 간신히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데, 갑자기 찬 바람이 훅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출입문 쪽을 바라보자 한 남학생이 가슴까지 오는 높이의 가방을 질질 끌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건 평범한 캐리어가 아닌 3단 이민가방이었다. 말 그대로 이민을 가기 위해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하는 체크무늬 가방. 학생이 사감 데스크 앞을 천천히 지나가는데 갑자기 나의 눈치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학생! 잠깐 나 좀 봐요." 학생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등을 휙! 돌리더니 지퍼에 자물쇠를 채우기 시작했다. 놈의 과잠에는 황금색으로 Department of Economics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어라! 이 자식 내 직속 후배 아냐? 역시 신촌 놈들은 건방져. 선배를 봤으면 깍듯하게 인사부터 해야지. "학생이 잘 모르나 본데, 사감 데스크 아랫쪽에는 X레이 투시기가 설치되어 있어. 공항 가봤지?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있다고." 물론 그런 최첨단 기계가 기숙사에 있을 리 없다. 얼마 전 비슷한 기계를 설치하자며 건의했을 때도, 총장은 눈이 보배라는 엉뚱한 말만 했으니까. 좋은 신호다. 놈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놈은 이내 체념한 듯 자물쇠를 풀고 지퍼를 열기 시작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아앗! 야! 조심해 지퍼에 머리 꼈단 말이야. 아아."

 어느새 놈의 옆에는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늘씬한 여학생이 서있었다. 그렇다. 발정 난 두 X놈들이 신성한 남자 기숙사에 침입을 시도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연휴 동안 도대체 뭘 하려고! 어! 보드게임 하려고!? 난 너희들 때문에 창작활동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말이야. 난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112를 누르려고 했지만, 옆에서 들려온 여학생의 목소리를 듣고 급격히 차분해졌다. "사감 선생님!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무언가 모태솔로의 아련한 감정을 훑고 지나가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재밌게 본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관대하다.

 "지금부터 내가 내는 문제를 맞히면 없던 일로 하지." 둘은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라 나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대신 틀리면, 지금 바로 기숙사를 퇴실하는 거야. 알겠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들은 어떤 유형의 문제냐고 물었다. "간단해. 내가 단어를 말하면, 너희들이 어울리는 답변을 하는 거야. 하지만 웃기려고 하는 건 곤란해. 내가 만일 사자성어를 생각하며 이구라고 했는데, 동성이 아니라 아나라고 하면 오답인 거야." 난 자신만만했다. 그들이 절대로 알지 못할만한 작품의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난 기습적으로 외쳤다. "B 사감과!" 그리고 속으로 하나, 둘쯤 세었을 때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브레터!" 이렇게 간단하게 지다니, 너무 허무했다. 여학생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남학생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여학생이 입은 잠바 위에 궁서체로 쓰여진 국문학과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여학생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현진건 작가님 덕분에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 되었네요. 그런데 사감 선생님! 운수 좋은 날에서 주인공이 아내한테 주려고 사 온 음식이 뭔지 아세요?" 질문을 던진 여학생은 내 답변을 듣지도 않고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렴 창작활동에 매진하는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당연히 순댓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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