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현섭 Mar 16. 2024

거래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재수 1년,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4년 도합 23년.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투입한 세월이다. 내가 올해 44살이니까 살아온 세월에 절반이 넘는 긴 시간이다. 얼핏 보면 꽤나 학문에 열성적인 사람 같지만, 실은 정 반대다. 과민성 대장염 때문에 수능을 망친 나는 재수를 택하면서 이를 갈았다. 반드시 목표로 하는 대학, 학과에 합격하고 말 거라고. 하지만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능 성적이 애매했던 나는 목표로 했던 과를 포기하고, 점수에 맞는 전공을 택했다. 그동안 시달리느라 고생할 걸 만회하기 위해 신나게 놀다 보니,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흘러갔다. 그리고 어릴 적 받은 심장 수술로 인해 군면제 대상이던 나는 어느새 졸업반이 되었다. 그때까지 이렇다 할 스펙 한 줄 없었으니, 취업이 될 리 만무했다. 실패의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조교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1학년 때 F를 받고 이번 학기에 재수강한 질적연구방법론 과제가 아직 미제출 상태라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놀았어도 전필 과목 미이수 시 졸업 불가라는 사실정도는 알고 있던 나는 급하게 내용을 짜깁기 해서 교수 연구실로 찾아갔다.

 "내가 지금까지 몇 명의 과제를 봤을 거라고 생각하나?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늦게 내는 것도 모자라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난 솔직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를 급하게 편집했습니다. 하지만 전필과목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교수님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자네 아직 미취업 상태지? 그럼 취업할 때까지만 내 연구실에서 조교로 일할 생각 없나? 용돈벌이 정도는 되고, 무엇보다 석사과정 등록금도 많이 감면받을 수 있고 말이야." 당시 난 연구실 한편에서 "아싸!"라는 감탄사가 왜 흘러나왔는지 몰랐다. 별도리가 없던 나는 교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20분 후 나는 학생회관 커피숍에서 아싸와 둘이 마주 앉게 되었다. "와! 대박! 진짜 조마조마했네. 다른 일 좀 알아보려고 해도 저 독사 같은 인간이 날 놔줘야 말이지. 그쪽도 알다시피 이쪽 분야가 굉장히 좁거든. 독사한테 찍히면 그냥 매장당한다고 보면 돼요." 아싸는 너무 고맙다며 A4용지 6장 분량의 업무 인계서를 주고 떠났다. (그렇게 고마우면 커피 정도는 샀어야 했는데) 천천히 읽어보니 그건 업무라기보다는 파충류 소녀가 작성한 독사의 이해와 대처법에 가까웠다. 하지만 난 취업만 하면 바로 그만둘 생각이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학부시절에는 놀아서 시간이 빨리 갔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원도 시간이 빨리 가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독사가 시키는 일만 해도 하루가 너무 짧았다. 하지만 취업에 계속 떨어지다 보니, 석사라도 하나 가지고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참고 또 참았다.

 세월은 흘러 흘러 석사논문 제출일이 되었다. 그날 연구실에는 2년 전 나와 비슷한 문제로 상담을 받는 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날의 아싸로 빙의해 속으로 아싸를 외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은 독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차라리 계절학기를 수강하겠다며 나가 버렸다. (응!? 계절학기?) 학생이 나가자, 독사는 갑자기 나를 불렀다. 독사 쪽으로 다가가자 책상에 놓인 나의 석사 논문이 보였다. "자네가 쓴 논문은 꽤 흥미로운 주제였어. 하지만 내가 볼 땐 아직 많이 부족해. 물론 석사도 좋지만, 박사까지 해보는 건 어때? 이 세상에 척척박사는 있어도 척척석사는 없잖은가. 허허." 30분 전에 올려놓은 논문을 언제 읽어봤다는건지 매우 의심스러웠지만, 독사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척척석사만 아니었어도 그냥 거절했을 텐데. 한 번은 속인 놈이 나쁜 거지만, 두 번은 속은 놈이 병신이라는 말을 누가 했던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난 박사과정 2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독사는 6년 내내 날 그렇게나 부려 먹었으면서도 마지막 논문심사까지 쉽지 않게 굴었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쥐어진 합격목걸.. 아니 Ph. D.

 한 분야의 극한까지 파고들었다는 기쁨도 잠시. 취업 때문에 시작한 공부가 끝나니, 아이러니하게도 취업이 어려운 나이가 되어 버렸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교수로 임용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너무 많았다. 특히 학계에서 탁월한 연구실적으로 인정받으면서도 해외 학위가 없어서 번번이 탈락하는 지인을 보며, 난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한 학기에 두 과목, 주당 여섯 시간, 시간당 사만오천원. 이게 바로 23년이 만들어 낸 냉정한 결과물이다. 나를 딱하게 여긴 독사가 다른 대학의 강사자리를 추천해 주기도 했지만, 부산까지 오가면 교통비가 더 나와서 그냥 거절했다. 하여튼 그 인간은 영 별로다.

 올해 2학기가 끝나고 남들은 다 쉬는 겨울방학에 교양과목을 하나 개설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도 별로 싫거나 하진 않았다. 워낙 돈이 급했으니까. 예비 신입생들을 위한 계절학기 과목이었는데, 지난 십수 년간 사골처럼 우려먹은 한국인의 문화와 심리라는 과목을 개설했다. 순진한 신입생들이 학점 받기 좋은 과목이라고 여겼는지 수강신청 인원은 300명가량 되었다. 첫날 내가 강의실로 들어가자 시끄럽던 분위기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교탁에 서서 빙 둘러보니 아직 고딩티를 벗지 못 한 학생들이 올망졸망 앉아 있었다. 난 칠판에 이름을 크게 써서 자기소개를 끝낸 뒤 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얼마 못 가 포기하고 말았다. 300명 넘는 이름을 어찌 다 부른단 말인가? 아직 정식 학생증을 발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동 출결 체크가 되지 않는다는 학과 조교의 안내가 있긴 했지만, 이건 아니다. 난 실라버스를 나눠주고 첫날이라는 핑계를 들어 한 시간만 강의하고 수업을 마쳤다. 농땡이에 굶주린 아이들이라 그런지, 반응은 역시 폭발적이었다. 너희들 등록금 대느라 등골이 휘는 아빠 생각 따위는 개나 줘.

 수업을 마치고 강사 휴게실에서 논문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다른 강사겠거니 생각하며,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업에 몰두했다. "저.. 교수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는데요." 뒤를 돌아보니, 한 여학생이 공손하게 앞으로 손을 모은 채 서있었다. 카멜색 더플코트에 베이지색 터틀넥을 입은 앳된 얼굴은 아직 법적 성인이 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여학생은 따뜻한 캔커피 한 개를 쓱 내밀었다. "이런 부탁드려서 죄송하지만, 앉고 싶은 자리가 있는데요." 처음에 난 예비 신입생 치고는 학구열이 남다른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앞줄에 앉고 싶어 하는. "전공도 아니고 교양과목인데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기특하네. 자리는 과별로 배치하고 있으니까 무슨 과인지 알려주면 그 과 전체를 앞줄에 배치해 줄게." 하지만 내 말은 들은 여학생은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앞줄에 앉고 싶어서 말씀드린 게 아닌데요." 그리고 이어진 짧은 침묵 끝에 여학생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얘기인즉슨, 오늘 강의실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봤는데, 그 학생 옆에 앉고 싶다는 거였다. 동창의 이름은 박정민. "남학생인가?"라는 물음에 여학생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질문으로 좋아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여학생의 표정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해주면 내가 얻는 건 뭐지?" 여학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수업 시간마다 캔커피 한 개씩을 교탁에 올려두겠다고 말했다. "학생 운 좋은 줄 알아. 사실 난 그 커피만 먹거든." 이렇게 우리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난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게 여학생을 배치할까 고민했다. 자리는 학과 별 가나다 순이기 때문에 박 씨는 무조건 무리의 중간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학생과 같은 과의 학생이 다섯 명뿐이라는 거였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던 나는 다섯 명을 그냥 뿔뿔이 흩어 놓았다. 물론 같은 과 친구들과 흩어진 여학생은 정민이 옆으로 배치하고. 계절학기는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수업 시간마다 교탁 위에는 캔커피 한 개가 꼬박꼬박 놓였다. 어느새 학기 마지막 날이 되고, 난 수업을 마치며 기말고사는 과제물로 대체한다는 공지를 했다. 그 뒤로 며칠 동안은 중간고사 답안지 채점과 기말고사 과제물을 검토하느라 무척 바빴다. 성적입력 마지막날 강사실에서 노트북으로 작업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남학생은 뛰어왔는지 헉헉 거리며 말했다. "교수님! 제가 다쳐서 지난주에 학교를 못 나왔습니다. 기말고사가 과제물로 대체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지만, 꾹 참았다. 그나마 계절학기는 절대평가로 학점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팠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과제물은 제 때 제출한 걸로 처리하겠네. 그런데 왜 다친 건가?" 남학생은 교통사고를 당해 며칠간 병원에 누워있었다고 답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던 나는 남학생에게 그만 가보라고 말했고, 남학생은 살짝 절뚝이며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과제물에 적힌 이름이 내 눈에 들어온 건. "잠깐! 자네가 박정민인가? 아까 분명 자네 과제물을 검토했는데 이상하군." 난 과제물 제출 명단을 다시 한번 빠르게 훑어봤다. 그리고 거기에 캔커피 여학생의 이름은 없었다.


"자네 혹시 같이 수업 듣는 학생이 있나?"

"제가 지방출신이라 아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는데, 두 번째 수업시간에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바로 옆자리에서요. 너무 오랜만이라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같은 과는 아니지?"

"네. 자리 배치표를 보면 과별로 나눠져 있는데, 제 친구는 혼자 뚝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

"자네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우연은  없는 법이네."


 난 겹겹이 쌓인 과제물 중에서 하나를 꺼내 정민이에게 건넸다. 정민이는 표지에 적힌 본인의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본 끝에 무언가 생각났는지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어디야? 어디냐고!?" 문을 열고 절뚝절뚝 뛰어가는 정민이의 뒷모습을 보며 난 테이블 한 켠에 쌓아 둔 캔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계절학기 2주 동안 월수금 수업. 총 6개. 거기에는 음료가 아니라 정민이를 향한 캔커피 여학생의 마음이 켜켜이 샇여있었다. 정말 봄이 오긴 오려나 보네.

 

작가의 이전글 사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