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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Apr 06. 2024

촉법

 나른한 일요일 낮잠만큼 달콤한 게 또 있을까? 꿈속에서 난 한없이 자유로워진다. 처음에는 연습을 통해 꿈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꿈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어떻게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마치 사과를 가리키며, 사과를 생각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끈질긴 시도 끝에 난 꿈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도 오늘과 같은 일요일이었다. 밀린 집안일을 끝내고 소파에서 잠을 자다가 '움찔'하며 눈을 떴다. 그때만 하더라도 '움찔'하며 깨는 게 꿈을 통제할 수 있는 첫단추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했다. 무언가 좋은 꿈을 꾸고 있던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가 되었다. 꿈속을 걷고 있지만,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리는 어정쩡한 상태. 그건 마치 태평양을 누비는 돌고래 같았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뇌의 반쪽만 수면 상태로 만드는 신기한 능력 말이다. 꿈속에서 난 베키오 다리 위에 서 있었다. 현실과는 무척 동떨어진 곳이라,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꿈속에 있는 건 아닌가?' 그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서, 난 왼쪽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과는 결이 살짝 달랐다. 좀 더 확실하게 판단하기 위해 난 다리의 난간 위로 올라갔다.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나를 쳐다봤지만, 그뿐이었다. 난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몇 마리의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붐비는 다리 너머로 석양이 붉게 물들어 갈 때쯤 대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노련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듯, 도시 전체에 종소리가 전염되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Bells bell!" 순간 난간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물고기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었는데, 어느새 난 공중에 떠 있었다. 붉은 하늘 위를 날며, 아름다운 피렌체를 구석구석 내려다본 적이 있는가? 특별한 감정은 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마침내 난 꿈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

 오늘도 반수면 상태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었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저 녀석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난 천천히 일어나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빠! 이것 좀 봐요. 잘 접었죠?" 막내의 손에는 A4용지로 접은 종이비행기가 들려 있었다. 얼마 전 다저스타디움 꼭대기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동영상을 함께 본 적이 있었는데, 막내는 그걸 재연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손을 떠난 비행기는  날개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그런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빠르게 하강했다. 실망한 막내의 요청에 따라 다른 비행기를 접고 있는데, 갑자기 첫째가 창문 너머로 손을 내미는 게 보였다. 난 제지하기 위해 급히 일어섰지만, 이미 무언가 첫째의 손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소리에 놀라 위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난 눈에 띄지 않게 급히 베란다 창문을 닫았다. "도대체 너 뭘 집어던진 거야? 어!" 잔뜩 주눅이 든 첫째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에는 빨간 물풍선이 들려있었다. '누군가 맞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크게 다칠 수도 있단 말이야!' 이렇게 따끔하게 혼냈어야 했는데, 오히려 내 머릿속에는 음침한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집 바로 아래층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다. 처음 이사를 와서 인사차 찾아갈 때만 해도 사이가 좋았는데, 요즘 부쩍 인터폰으로 항의하는 횟수가 늘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린 탓에 아무리 주의를 줘도 쿵쿵거리며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애들은 뛰면서 크는 거라며, 롤케이크를 받아먹을 때는 언제고' 난 기분이 상했지만, 부모로서 그들을 만날 때마다 고개 숙여 사과했다. 어제도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할머니를 만났는데, 다짜고짜 애들 좀 단속하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게 아닌가. 가뜩이나 직장에서 짜증 나는 일이 있던 나는 할머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뭐 가져다 드릴 때는 잘 받으시더니, 그렇게 시끄러우면 이사를 가세요." 당황한 할머니는 14층에 도착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하게 내렸다. 최근 갑자기 날씨가 더워지면서 노부부가 오후 내내 놀이터 정자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알고 있던 나는 첫째에게 물풍선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베란다 창문을 열고 놀이터를 향해 힘껏 던졌다. 30분쯤 흘렀을까? 누군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난 경찰서 취조실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저도 깜빡 속았지 뭡니까. 겁에 질린 아이가 울면서 본인이 했다는데, 안 믿을 도리가 있어야지요. 하지만 선생님의 말을 듣고 갑자기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아이를 달래는데 집중하기 마련인데, 선생님께서는 엉뚱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이가 촉법소년이라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라고요. 전 선생님이 변호사라서 그런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 신원조회를 해보니, 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갖고 계시더군요. 곧 주변 CCTV를 분석할 예정이지만, 저는 선생님께서 물풍선을 던졌다고 확신합니다. 왜냐고요? 아까 제가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놀이터는 분명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의미하는 건 범인이 무언가를 왼손으로 던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요. 잘 못 했다며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사탕을 꺼내주었을 때, 아이는 분명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 건 생각하고 나오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많이 쓰는 쪽을 내밀었을 뿐이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땠나요? 제가 믹스커피를 내밀었을 때 분명 왼손으로 받으셨습니다. 주변인들을 좀 더 탐문해 봐야 알겠지만, 선생님은 분명 왼손잡이시죠? 하하하. 답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전 생각보다 집요하니까요. 한 번 문 먹잇감은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물풍선에 맞은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응급실 당직의가 그러더군요. 목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요. 하반신이 마비될 수도 있다는데, 그건 평생을 휠체어 위에서 지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참! 첫째에게 무슨 협박을 하신 겁니까? 얼마나 다그쳤으면 자기가 하지도 않은 잘못을 아빠를 위해 뒤집어쓰겠다고 하냔 말이에요! 선생님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전 사람 같지도 않은 놈들을 잡아넣는데 큰 희열을 느끼거든요. 단단히 각오하십시오."


  내가 몇 마디 답변을 하자, 형사는 미란다원칙을 고지하기 시작했다.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직 나에게는 50%의 높은 확률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건, 이런 엿같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도 50%란 얘기다. 난 조심스럽게 왼손을 들어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그건 현실에서 느끼는 생생한 고통정확히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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