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현섭 Apr 08. 2024

모순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본성'은 흥미로운 탐구주제였다. 다른 동물에 비해 훨씬 복잡한 사고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을 법률이나 도덕으로 일반화시키려 해도 항상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을 넘어서는 현인들도 이 주제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그들 역시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게서 느끼는 복잡함과 양면성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 도덕시간에 한 번쯤 만나게 되는 인성론은 인간의 성품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다고 주장한다. 인성론은 크게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로 나눌 수 있으며, 단어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본래 성품을 '善, 惡, 無善惡'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바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고 인성론을 주장한 현인들 사이의 교집합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건 바로 인간의 본성이 어떻든 간에 후천적인 학습이나 경험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인성론은 인간의 다양한 본성에서 발현되는 공통적인 방향성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선과 악 9대 1이나 1대 9와 같은. 하지만 선과 악이 5대 5인 경우는 과연 없을까? 이런 경우에 인간은 선한 존재일까? 아니면 반대일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같은 작품을 보면, 인간은 선한 동시에 악하다. 서로 다른 인격이 한 사람 속에 절반씩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유리컵에 물을 담고 검은색과 하얀색 물감을 떨어뜨렸는데, 회색이 되지 않고 각자 뚜렷한 색으로 남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인간의 양면성은 이중인격자에게나 나타나는 특성일까?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매달린 아이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인간이고, 임신한 동료가 마시는 음료에 독극물을 집어넣는 것도 인간이다. 처음 보는 아이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는 숭고함과, 매일 보는 동료의 등에 아무렇지 않게 칼을 꽂는 잔인함이 하나의 영혼에 깃들어 있다.

 비교적 판단하기 쉬운 선과 악에 대한 입장도 이렇게 다양한데, 어떤 주제에 대한 개인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다. 요즘 나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 한 가지 단어에 집중한다. 그건 바로 '관심 없음'이다. 어떤 주제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을 때 '관심 없음'은 정말 몰라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돈, 승진, 자식교육 등에 별 관심이 없다고. 만약 그들이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자식들도 올바르게 키웠다면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보통은 앞서 나열한 주제에 결핍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무지한 게 정상일까? 조직 생활을 하면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자녀를 낳고 제대로 키우고자 하는 의지가 비뚤어진 걸까? 물론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결핍을 해소하는 건 곤란하다. 다른 누군가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더 시급한 일이 있어서 신경을 못 쓴다.' 정도가 올바른 답이지 싶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렵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고자 노력한다. "I'm not interested."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솔직하지 않은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진심으로 초연한 상태인지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주말 난 세 가지 계획을 세웠다. 1번 벚꽃 구경, 2번 손세차, 3번 사전 투표. 순서에서 보다시피 투표가 가장 뒷전이었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장족의 발전이다.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총선에 참여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막내가 누구를 뽑을 거냐고 물었는데, 평소처럼 모른다고 하려다가 문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모든 것에 유연한 자세로 다가가길 원하는데, 나의 태도가 막내에게 전염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니까. 운동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주민센터를 방문하자, 사전 투표 막판몰린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투표소는 4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줄이 1층 주차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합류한 지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아내가 말했다. "앞으로 1시간은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 배고프니까 10일에 투표하자. 아예 안 해도 좋고." 평소 투표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아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어색했지만, 줄 서는 극도로 싫어하는 나로서는 울고 싶을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자 제안했고, 결과는 다행히(?) 아내의 승. 다음 일정에 따라 우리는 세차를 마치고, 벚꽃을 보러 갔다. 오랜만에 방문한 벚꽃 명소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젊은 부부들은 십년 전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엄마는 유모차를 끌고, 아빠는 짐을 잔뜩 짊어진 채 아이를 잡으러 뛰어다니고. 아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 가족의 추억이 묻어있는 장소가 여기저기 보였다. 그리고 분홍색 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낭만적인 상황 속에서, 엉뚱하게도 난 투표를 꼭 하리라는 다짐을 했다.


작가의 이전글 촉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