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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Apr 25. 2024

첫째

 무더운 여름의 절정을 향해 가던 어느 날이었어. 긴급한 용무가 아니면 근무시간에 절대 사적인 통화를 하지 않는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지. 아빠는 중요한 부서회의 중이었지만, 슬쩍 빠져나가 전화를 받았단다. 그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네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르는구나. 그건 뭐랄까. 교무실에 끌려온 아이가 어떤 잘못을 고백할 때 나오는 음색이었어.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오색빛깔 화면조정 시간에 울려 퍼지는 삐~ 소리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지. 아! 맞다. 넌 화면조정이 뭔지 모르겠구나. 아빠가 너만큼 어렸을 만 해도 지금처럼 케이블이나 OTT가 있지 않았어. 그저 6시부터 24시 정도까지 나오는 정규방송뿐이었지. 정규방송으로 편성된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면, 애국가가 (4절까지) 울려 퍼지고 화면조정 시간이 시작되는 거야. 그리고 오색빛깔 화면의 BGM으로 마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멈췄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음이 울려 퍼졌단다. 정규방송이 끝난 아쉬움에 TV를 끄지 못하는 사람을 가차 없이 침대로 가게 만드는 마법의 소음. 아무튼 아빠는 엄마에게 정확하게 확인해 보자는 말만 남기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어.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아빠는 무척 당황했던 것 같구나. 보통 인간은 경험이 쌓이면서 특정 자극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을 보이기 마련인데, 내 경험 속에 '아빠 되기'라는 장면은 없었거든. 최근에는 훨씬 심해졌지만, 15년 전에도 28살 남자가 아빠가 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단다. "내가 드디어 아빠가 되었어!"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드라마 장면은 확실히 과장된 것 같구나. 대신 아빠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으니까. '이제부터는 먹여야 할 입이 하나 늘었구나.' 하고. 재밌는 사실을 알려줄게. 너의 존재를 알기 몇 주 전부터 엄마는 삼복더위에도 춥다며 솜이불을 찾았어. 그게 바로 강력한 임신 시그널이었던 거지. 그리고 큰 배 위에서 자신의 어깨 높이까지 오는 분홍색 돼지들에 둘러싸인 꿈을 꾸었다며, 복권을 사자고 했어. 아빠는 예지몽을 별로 믿지 않지만, 그 돼지꿈이 너의 태몽이었던 것 같구나. 네가 요즘 들어 가뿐하게 100kg를 돌파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꽤 설득력 있지 않니?

 편한 대로 생각하는 게 특기인 아빠는 태명은 대충 지어야 좋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었어. 그리고 너의 태명을 준으로 지었단다. 어딘가에서 아기는 10달을 품어야 태어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고, 대충 계산해 보니 네가 6월(June)에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 너무 성의 없다고 원망하지 않길 바란다. 네 동생들은 더 심했으니까. 하지만 첫 번째 산부인과 진료에서 알게 된 너의 예정일은 4월이었어. 병원을 나오며, 엄마와 둘이 황당하다고 웃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20대 어린 부부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아침부터 이어진 산통 끝에, 넌 2009년 4월 25일 토요일 저녁 6시 32분에 태어났어. 엄마의 머리맡에서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너의 울음소리와 함께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어. 글쎄 나보고 탯줄을 직접 끊으라고 하더라고! 그딴 걸(?) 하기 위해 분만실에 있었던 게 아닌데. 의사가 불쑥 내민 너의 탯줄은 바로 전날 회식 때 먹은 꼼장어와 똑같은 모습이었어. 색깔과 질감까지 감쪽같았지. 첫 아이를 만나는 감동적인 순간인데 너무 질기다며 궁시렁대는 백부장의 목소리가 떠올랐어. 그리고 아빤 간호사가 주는 가위를 받아 들었지. 검은색 손잡이에 날이 잘게 울렁거리는 가위였어. 탯줄이 길어서 아무 곳이나 대충 끊으면 될 것 같았는데, 의사가 파란색 플라스틱 클립으로 표시한 곳을 끊으라고 하더라. 난 최대한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아서, 실눈을 뜨고 한 번에 싹둑 잘랐어. 역시나 꼼장어의 허리를 끊는 느낌과 비슷했어. (만약 그것의 허리가 있다면 말이야) 나중에 조리원에서 기념이라고 네 탯줄을 준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보렴. 바싹 마른 무말랭이 같은 탯줄이 집안 어디엔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고 있을 거야. (행여나 먹지는 말고)

 아들아! 어릴 때는 무슨 짓을 해도 귀엽다고 칭찬받았는데, 막상 중딩이 되니까 세상살이가 마냥 쉽진 않지? 특히 엄마처럼 모든 걸 스스로 노력하여 이룬 사람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게 무척 어렵다는 걸 잘 안단다. 엄마가 워낙 엄해서 내가 널 좀 풀어줘야 하는데, 가끔 새벽에 몰래 게임하는 모습을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잔소리가 절로 나오는걸 어쩌겠니. 하지만 아빠는 믿는다. 네가 지금처럼 바르고 선한 눈매를 지닌 사람으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먼 훗날 우리 부부가 이룬 많은 것들 중, 네가 가장 앞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너의 15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이만 줄인다. (너도 둘째처럼 토X뱅크 쓰면 안 되겠니? 생일 선물로 돈을 원하니까 하는 말인데, 뽑으러 가기가 매우 귀찮구나. 그리고 어제처럼 까마귀를 봤더니, 쓰레기 분리수거 하는 걸 까먹었다는 이상한 드립은 치지 마라. 앞으로는 국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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